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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곳은 없다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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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매혹된 후 숲에 있는 집을 잃어버린 그녀가 돌아갈 집은 어떤 곳인가. 그녀의 집이 있는 숲은 “주소가 없”고 “숫자가 통용되지 않는 곳”, “그냥 하나의 덩어리일 뿐이”다. 그녀의 집이 있는 숲은 아마 이런 곳일 것이다. 그곳은 사람도 없고, 학원도 없고, 학교도 없고, 경찰도 없고, 공장도 없고, 병원도 없고, 백화점도 없고, 동물원도 없고, 교회도 없고, 직장도 없고, 화폐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연애도 없다. 그래서 질서도 없고, 위계도 없고, 차별도 없고, 범죄도 없고, 불평등도 없고, 배반도 없고, 사고도 없고, 거짓도 없고, 싸움도 없고, 경쟁도 없고, 오염도 없고, 위험도 없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 또한 없는 것이다. 그곳은 비문명에 가까운 곳이었다.(장은진,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 아무 것도 없는 그곳은 “있는 만큼만, 가능한 만큼만 욕망하”는 곳이다. 그런 숲과 달리, 도시는 “고지서에 나열된 숫자” “무게를 재는 저울처럼 내 소비 행태를 매달 눈금으로 보여주는 성실한 그것”이 지배하는 곳이다. “숲에서는 교환이 필요 없지만 도시에서는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를 가졌으면 비슷한 하나를 상대방한테 줘야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도시다. 도시에는 공짜가 없다.” 그러면 그녀는 지금 이 도시에서 다시 그 숲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가로등이 필요하기도 하고 필요하지 않기도 한, 어둡기도 하고 어둡지 않기도 한, 경계의 시간”에 태어난 그녀가 전기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도시에 숲을 그리워할 뿐, 다시는 그 숲으로 돌아갈 수 없다. 성실한 숫자에 의해 작동하는 도시는 숫자도 교환도 없는 그런 숲을 더 이상 알지 못한다.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 그녀의 집은 어디에도 없다. 그녀의 집이 있는 숲에는 ‘없는’ 모든 것이 이 도시에는 모두 있다. 장은진의 수집은 일단 세계에서 후퇴하는 가운데 새로운 방식의 소통을 시도하기 위한 것이다. 뼈를 모으고, 음식을 나누고, 페이지를 찢고, 편지를 쓰는 가운데 ‘너’에게 다가간다. 책의 페이지를 찢고 편지를 쓰면서 ‘너’를 나만의 방식으로 수집한다. ‘너’에게 고유한 번호가 부여된다. 누군가 ‘나’를 수집해 주길 기다린다. “그게 단 한 사람뿐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해서 수집된 목록들은 ‘아무 것도 없는’ 그런 곳을 꿈꾸기 위한 재료다. 하지만 그런 곳은 없다.  
 
한순미, <어두운 시대를 향한 반란>, <<우리 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17-118쪽.  
최유준 외저, <<우리 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117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