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DB에서 검색하고자 하는 내용을 입력하고 를 클릭하십시요.


   ‘붉은 색을 먹다’

노(怒)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내용보기

어떤 이에게 수집은 무언가를 모으는 것만이 아니라 한꺼번에 모아서 버리기 위해서도 편리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런 수집 행위는 자본주의의 삶의 형태인 축적과 소비에 대응한다. 이 점에서 수집은 ‘자본적 삶’을 구성하는 숨은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수집가에게 필수불가결한 ‘숫자’는 등가적 교환체계 시스템을 가능하게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단위이기도 하다. 표면상 도시의 일상을 그리고 있는 듯하게 보이는 장은진과 김희진의 소설은 ‘수집’과 ‘숫자’를 매개로 볼 때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 삶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탐구로 읽을 수 있다. 이들은 세계로부터 고립된 곳에서 사람, 사물, 일상을 수집하고 이를 통해 타인과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때로 숫자는 사유를 전개하는 긴요한 방법이 된다. 김희진의 <혀>와 <붉은 색을 먹다>에서 펼쳐지는 기이한 사건은 사라짐과 되돌아옴, 삼킴과 내뱉음, 이 두 가지 반복구조로 읽을 수 있다. <혀>는 어느 날 입 속에서 사라진 혀 떼들이 몰려오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떠도는 혀가 여러 사람들의 말을 함부로 실어 나르고 뒤섞는 사태를 가져오자 정부는 가칭 ‘혀 찾아 주기 운동 본부’라는 기구를 창설하여 범세계적인 기구로 확장해 나갈 구상을 하기도 한다. 혀가 진짜 주인에게 돌아가 언어가 섞이고 사적인 말이 노출되는 일이 없어져야 한다는 게 정부의 뜻이었다. 처음부터 말을 하지 못한 ‘나’는 이런 사태에 당황하지 않으며, 허공을 떠도는 혀 떼들 중에서 쉽사리 하나를 삼키지 않는다. “아주 싱싱해 보이는 혀 하나를 꺼낸다. 나는 누구 것인지도 모를 그 혀를 입으로 가져가려다, 만다. 내 손에서 벗어난 혀는 다시 허공을 맴돈다.” 혀가 사라진 세상이 인간들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결과를 낳게 되더라도 함부로 다른 사람의 혀를 삼켜서는 안 된다. 사라진 혀는 제 자리로 되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붉은 색을 먹다>에서는 앞서와 다른 방식의 실험이 전개된다. 여자는 세상의 모든 붉은 색을 하나둘씩 먹기 시작한다. 그러자 “제로섬게임처럼” 여자의 몸은 붉게 물들어 가고 세상의 붉은 색은 점점 사라진다. 여자가 “신호등, 간판 글자, 행인들의 옷, 지나가는 소방차까지”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자 교통 체계는 마비된다. 급기야 여자는 “언어와 낱말”, “기억” 속의 붉은 색까지 삼킨다. 예상치 못한 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급기야 남자는 ‘새빨간’이라는 언어와 낱말 속에 있는 붉은 색마저 먹어 버렸다. (…) 보수성향의 의원들은 ‘빨갱이’를 대처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여야 의원들은 이에 대해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한쪽에서는 비록 언어라 할지라도 그런 시대착오적인 유물은 사라져야 한다고 성토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완전히 붕괴되지 않은 이상 필요한 언어라고 못을 박았다. 또 다른 진보 정당은 정치적으로 악용돼 온 언어가 사라진 건 시대적 대세라며 흐뭇해했다. 보수 논객들도 하나둘 뭉쳐 ‘빨갱이’ 사수에 나섰다. 중요하고 만만한 글감이 사라지게 될 위기에 놓였으니 당연했다.(김희진, <붉은 색을 먹다>) 그 결과, “빨갱이”라는 말이 사라질 위기를 초래했고 그에 대한 정치권의 반응은 당연 뜨거웠다. 언어에서 붉은 색을 먹어버리자 “빨갱이”라는 단어의 존폐 문제가 정치권의 논란을 일으킨 것이다. “빨갱이”라는 단어가 사라짐으로써 생길 혼란에 대한 반응은 여야 의원과 보수 혹은 진보 성향의 논객들, 저마다의 관점에서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여자와 남자는 “마지막으로 사람들 기억에 남아 있는 붉은 색마저 먹어 버리기로” 결심한다.  
 
한순미, <어두운 시대를 향한 반란>, <<우리 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13-115쪽.  
최유준 외저, <<우리 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113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