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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히만과 무젤만 사이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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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억은 시공간의 격차를 지우고 지금 여기의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현재다. 전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전쟁이 났을 때 사람들은 서로 묻고 답한다. ‘군인’들은 무엇을 지키는가. “나라요? 나라의 어디를 지킨다는 거죠? 우리를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요?”(정용준, <여기 아닌 어딘가로>) 군인은 “나라”, “우리”, “국경”, 그 중에서 무엇을 지키는가, 지켜야 하는가. 정용준의 소설에서 이러한 물음은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그때의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을까.”를 더 묻기 위한 전제다. 설사 군인들이 우리를 지키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순수했다. 그들에게는 의도가 없었고 오직 학습받고 물려받은 행위만 있었다.”(정용준, <위대한 용사에게>) 그들은 죄책감을 모르기 때문이다. 소금밭 ‘굴도’를 관리하는 사람들은 “집에는 갈 수 없어”, “아프면 안 돼”, “그냥 무조건 열심히 일 해”, “될 수 있으면 생각을 하지 마”, “말은 안 돼”라는 법과 규율을 만들고 그것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사람들이다. 군인의 법과 명령은 이미 인간의 조건을 박탈당한 “살아 있는 시체”들을 지배한다. 신분증을 도용당한 후 섬으로 끌려온 노숙자 사내의 몸에는 이름 대신 번호가 새겨진다. “살아 있는 시체”들은 “절망적인 미래”를 보면서 “낙오하지 말자, 규칙을 어기지 말자,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자, 살아남아야 한다.”(정용준, <벽>)고 다짐한다. 이를 거쳐서 정용준의 시선이 닿은 곳은 순수한 군인 ‘아이히만Karl Adolf Eichmann’과 살아있는 시체 ‘무젤만der Muselmann’, 둘 다이면서 둘 다가 아닌,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유령”과 같은 존재들이다. 열다섯 명을 죽인 남자 수감 번호 474는 오직 ‘법’에 의해 ‘사형’되길 원한다.(정용준, <유령>) 다음은 474의 진술이다. 제가 죽인 사람은 어떤 기록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미결이거나 사고로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날부터 그만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냥 멈추고 싶었어요. (…) 뭐랄까, 정당한 방식으로 끝내고 싶었습니다. (…) 누군가에게 저는 자연이고 운명입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의 행위에는 의도가 없습니다. 죽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없고 그것으로 인한 쾌감도 없습니다. 저는 그들을 그냥 죽입니다. 저는 미워하는 사람이 없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제게는 복수도 없고 오해도 없지요. 제 살인은 어떤 의미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정용준, <유령>) 이것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 아니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사랑도 복수도 욕망도 쾌감도, 어떤 의도도 없는 474는 자연의 재앙이 죄책감과 용서를 모르듯이, 살인과 파괴에 대한 어떤 자책도 느끼지 않는다. 또 그에게 살인은 자신의 ‘외로움’을 증명하는 정당한 방법이었다. 474는 살해함으로써 “정당한 방식으로” “그냥 멈추고 싶었”고 “다만 반복되는 이 궤도 밖으로 나오고 싶었”으며 “어떤 운명이 있다면 그것을 분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진정 하고 싶었던 것은 “저를 움켜쥐고 분노하고 흥분하며 죄를 짓는 사람들”, “저로 인해 강해졌고 원한이 많았던 자들”, “저로 인해 원한을 풀었”던 “겁쟁이들”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474는 극단의 증오에 사로잡힌 동물이면서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결백한 인간이다.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프리모 레비의 증언적 물음보다 정용준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474가 문제적인 것은 법 바깥에 있었던 살아 있는 시체가 수용소의 안과 밖을 지배하고 있는 법의 실체를 동시에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민번호도 없이, 지문 없는 유령으로 살았던 그에게 살인은 자신의 존재를 이 세상에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과 동시에 자신을 소외시킨 그 법이 어떻게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한순미, <어두운 시대를 향한 반란>, <<우리 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08-110쪽.  
최유준 외저, <<우리 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108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