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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과 고통을 통한 ‘슬픔’의 사회적 재생산

애(哀)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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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회적 감성이 형성되는 역사적 기원을 한국근대사에서 상상해본다면,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을 떠올릴 수 있다. 당시에 관군이나 일본군들에게 희생된 민초들은 얼마나 많았고, 그들의 가족들은 어떻게 그 슬픔을 표현했을까? 당시에 희생된 농민들에게는 안식할 장소가 허용되지 않았고, 그들의 가족들은 크게 울 수조차 없었다. 그 사건은 ‘동학난’으로 명명되었고, 이 싸움이 끝난 후부터 일본의 식민지배가 끝나는 50년간 이런 상태가 지속되었으므로, 농민군에 대한 기억과 그 가족들의 슬픔은 거의 지워져버렸다. 그들의 고통과 슬픔의 감정은 제대로 표현될 수 없었으며, 기층사회의 민중적 감성으로만 남았다. 이런 운명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저항했던 의병들과 그들의 가족, 또는 지역공동체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역사와 기억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겪었던 좌절과 슬픔은 <녹두꽃과 파랑새> 같은 노래의 감성으로 남았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일제하의 민중생활을 담은 사진들을 보면, 기쁨에 겨워 환호하는 사람들을 찾기 어렵다. 슬픔에 겨워 통곡하는 사진들도 거의 찾기 어렵다. 한국인의 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들은 말 그대로 자기재현이라기보다는 서양에서 온 여행객이나 선교사들에 의해 그리고 일본 지배당국에 의해 찍힌 것이 대부분이지만, 무엇인가 그들만의 감성을 깊숙히 내장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1919년 3.1운동은 조선총독부나 식민지배자로서의 일부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조선총독부는 지배정책의 방식을 바꾸었고,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의 실상 또는 조선인의 내면을 알지 못했다고 후회했다. 이들은 조선인들의 드러난 말이나 행동보다는 내면세계를 알고자 했고, 이를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의 내면세계는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20년부터 조선인 민간신문사에 의해 조선의 산천이나 주민들이 공공적 영역에 나타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 식민지 지배를 비판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을 비관하거나 울분, 슬픔을 토로하는 각종 텍스트들은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1930년대 초반에 이르면, 표현의 영역에서의 작은 저항들조차 통제의 대상이 된다. 이런 문화적 통제와 함께, 식민지 교육의 영역에서는 교육된 정서를 뜻하는 정조(情操)가 교육의 대상이 되었다. 정조교육은 몸을 가누는 품행교육과 세트를 이루는 ‘보통교육’의 핵심이었다. 식민지 학교에서 시행된 음악, 미술교육과 함께 ‘일기쓰기’ 교육은 조선인의 감성교육이자 내면세계의 근대적 형성과정이었는데, 그것에 수반되는 ‘일기 검사’는 감성과 내면조차 권력에 의해 발가벗겨지고 해부되는 메커니즘이었다. 총력전 체제하에서 강조된 연성(練成)은 사상, 의지, 체력, 감정을 대상으로 하였다. 연성된 감정은 일종의 사회적 감성으로 전환된다. 식민지하 감성의 형성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통로는 대중적 시각매체와 소리매체들이었다. 근대적 대중매체들은 면접적 상황을 넘어서서 보다 빨리 그리고 보다 넓게 정보를 유통시키고 감성을 주조하였다. 영화, 연극, 음반은 감성을 균질화하는 통로였고,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검열을 통해 이를 통제하려고 시도하였다. 배우들의 몸짓이나 변사들의 해설, 또는 성우들의 대사는 특정한 민족적 감성을 만들어냈다. 만담에도 민족적 슬픔이 표면적 웃음 아래에 깔려 있었다. 
 
정근식, <사회적 감성으로서의 슬픔>,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0-22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20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