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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품의 질서가 지배하다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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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이룩한 한국의 민주주의는 오늘날 위기에 처해 있다. 공적인 질서(법) 관념이 힘을 가진 어느 사적인 질서(법) 관념에 의해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공적인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지만 사적인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사적인 분노를 공적인 분노 속에 의도적으로 섞는 일도 있고, 그런 일이 있다는 이유로 공적인 분노를 지극히 당파적인 사적인 분노에 불과한 것처럼 폄하하는 일도 있다. 또 공적인 분노와 사적인 분노를 스스로 잘 분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혼동과 의도적인 뒤섞기 탓에 공적인 분노가 힘을 잃고 질서들의 질서(민주주의)를 바로 잡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질서를 사적인 질서로 간주하고, 모든 분노를 사적인 분노로 축소해버리는 이른바 ‘사사화(私事化)’ 현상 이면에는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을 압도하는 하나의 단일한 질서가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바로 상품의 질서이다. 오늘날 공적인 질서 관념과 그에 근거한 공적인 분노가 힘을 잃고 쇠퇴하는 배경에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들고 모든 행위를 상품을 팔기 위한 일종의 전략적 행위로 인식케 하는 상품의 질서가 놓여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이 상품의 질서 안에 놓여 있고, 그 안에서 일정한 자리를 부여받고 있다. 앞에서 사과 열 개를 팔기 위해 상품가치에 따라 분류하여 늘어놓은 상인의 예를 들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상품으로서 분류되고 배치된다. 결혼정보회사의 회원들은 혼인시장에서 잘 ‘팔리는’ 순서대로 분류되고 배치된다. 고등학교 학생들은 입시시장에서 잘 ‘팔리는’ 순서대로 분류되어 배치된다. 텔레비전의 방송프로그램도 광고시장에서 잘 ‘팔리는’ 순서대로 분류되어 차별적으로 배치된다. 상품의 질서 안에서는 사람 자체가 상품가치에 따라 배치될 뿐만 아니라,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한 전략적 행동으로 간주되고, 그로 인해 모든 행동의 의미가 지극히 사적인 것이 되고 상대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공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어느 연예인의 트윗 글은 자신의 사적인 당파성을 드러내는 것이 되거나, 아니면 그저 연예인으로서 주목을 받으려고 하는 행동이 된다. 청문회에서 증인을 심문할 때 표출되는 어느 국회의원의 분노도 그저 당파적 입장에서 비롯한 것이 되거나, 아니면 그저 재선을 노리고 언론의 주목이나 받아보려고 하는 전략적 행동이 된다. 종합편성채널이 정치보도를 쏟아내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현상도 이것이다. 과거에 방송이 공적인 질서 안에서 소통의 채널 역할을 했고 정치적인 쟁점도 공적인 질서의 관점에서 심도 있게 다루려고 노력했다면, 이른바 ‘종편’이 등장하고 그것이 보도기능까지 수행하는 오늘날 방송은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5.18 민중항쟁에 북한의 특수부대가 개입했다고 주장한 것처럼) 자신들의 사적인 질서 안에서 정적에게 노골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좌우 동수로 패널을 구성하는 식으로) 기껏해야 기계적인 중립을 추구하여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당파적 입장에 불과한 것처럼 인식하게 하거나, 더 심하게는 (「썰전」에서의 강용석과 김구라처럼) 정치를 아예 상품시장 속의 일처럼 묘사함으로써 사실상 모든 공적인 질서와 그에 근거한 행위, 그리고 분노를 무력화하고 있다. 모든 것이 사적인 것이 되고 상품이 되는 이 질서 안에서는 어떤 ‘거룩한 분노’도, 종교보다 아름답기는커녕, 그저 웃음만 자아내는 일이 되고, 매체의 홍수 시대에 어떻게든 눈에 띄려고 안달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게 된다. 오늘날 분노는 이렇게 점점 공적인 의미와 기능을 잃고 상품의 질서 안에 갇혀 일종의 ‘리액션’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공분을 터뜨리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이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리액션 좋아!” 또는 “리액션이 너무 진부하잖아!” 
 
공진성, <공적 분노의 소멸>, <<우리 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54-57쪽.  
최유준 외저, <<우리 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54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