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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화의 과정은 폭력적 과정이다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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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과정은 많게나 적게 폭력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물리적 파괴와 관련해서만 민주화의 과정이 폭력적인 것은 아니다. 한국어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폭력violence은 위반violation을 함축한다. 무엇을 위반하고 무엇을 침해한다는 말일까? 일정한 법과 질서를 위반하고 그 속에서 부여되는 권리를 침해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눈에 보이는 인체의 질서와 사물의 질서를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것만 폭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 안에서 부여되는 권리를 침해하는 것도 폭력인 것이다. 민주화의 과정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관념 속의 질서를 바꾸는 과정이었고, 그런 만큼 또한 폭력적인 과정이었다. 어느 날 자식이 아버지/어머니에게, 그리고 학생이 교사와 교수에게 ‘동무’라고 부르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실제로 68혁명 이후에 독일의 대학에서 급진적인 교수의 강의실에서는 교수와 학생이 의도적으로 서로 반말을 하며 수업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시간이 흐르고 익숙해지면, 즉 새로운 질서에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편입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처음에는 분명히 그것이 매우 폭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노년/장년 세대와 청년 세대 사이에 유사한 갈등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연장자가 하대하는 것을 폭력적으로 느끼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젊은이가 수평적으로 대꾸하는 것을 오히려 폭력적으로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길가에서 자주 보게 되는 광경이 “어디다 대고 함부로 반말이야”와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충돌하는 것이다. 한쪽은 자신이 가진 대등한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느끼고, 다른 한 쪽은 자신이 어른으로서 가진 우월한 권리가 무시되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폭력(의 인식)은 분노를 유발하고, 분노는 다시 폭력을 유발한다.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분노는 자신이 속한 질서가 파괴되고 그 안에서 보장받던 권리가 체계적으로 침해될 때 발생한다. 거대한 구질서와 신질서가 충돌하는 과정은 물리적으로만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관념적으로도 폭력적인 것이며, 그로 인해 엄청난 분노가 표출되는 과정이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져가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그 안에서 과거에 자신이 누리던 권리가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 어찌 그것을 폭력적으로 느끼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반대로, 자연적인 원래의 질서(예컨대 평등한 질서)가 오랫동안 어떤 집단에 의해 유린되어온 것을 깨닫고서, 그리고 그 질서 안에서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오랫동안 빼앗겨온 것을 깨닫고서 어찌 현재의 질서를 폭력적으로 느끼지 않을 수 있으며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분노한 민중이 치켜든 무기만 폭력적인 것이 아니고, 그렇게 반항하는 하층민을 제압하는 군대와 경찰의 힘만 폭력적인 것이 아니고, ‘원래의 올바른’ 상태에서 벗어나 ‘부당하게’ 강요되고 있(다고 인식되)는 질서 자체도 그 질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폭력적인 것이다. 그런 폭력 앞에서 사람들은 분노하고, 분노한 사람들은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온갖 힘을 다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다른 질서 관념을 가진 사람에게 폭력적인 것이 된다. 이렇게 폭력은 폭력을 부르고, 분노는 분노를 부른다. 민주화의 과정은 이처럼 거대한 질서와 질서가,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질서를 관철시키려는 폭력과 그런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폭력이 서로 맞부딪치면서 시작되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처음에는 새로운 질서가 옛 질서를 대체하기도 했지만, 이내 옛 질서가 복구되어 새 질서를 대체하기도 했고, 다시 새 질서가 새로운 옛 질서를 무너뜨리고 복귀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차례 질서들의 교체가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일들도 일어났지만, 결코 과거와 같이 하나의 질서가 의심받지 않고 사회를 지배할 수는 없게 되었다.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의 운명처럼, 한 번 나누어진 질서는 다시 하나가 될 수 없었고, 오히려 질서order는 계속해서 나누어져 질서들orders이 되었다. 막스 베버는 이런 변화를 두고서 ‘가치의 다신교적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질서의 분화는, 그리고 그로 인한 질서의 상대화는 불가피한 일이 되었다. 질서의 분화와 상대화는 관념의 영역에서는 극단으로 치달아 허무주의에 이르기도 했지만, 현실의 영역에서는 덜 폭력적인 질서, 곧 ‘질서들의 질서order of orders’인 민주주의를 낳았다.  
 
공진성, <공적 분노의 소멸>, <<우리 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49-51쪽.  
최유준 외저, <<우리 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49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