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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서진 물음

애(愛)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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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사랑의 거처를 묻는 것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것보다 우회적으로 사랑에 근접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사랑의 모호한 형상을 불현 듯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글의 관심은 사랑의 형상을 발견하는 데에 있지 않다. 그것보다, 나는 지금 이 순간 그 어딘가에서 사랑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에게서 사랑은 대체 어떤 이야기로 자리하고 있는지를 더 읽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다른 방향으로 한 걸음 옮겨서, 다시 묻자. 그들은 무엇을 사랑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사랑할 수 없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뚜렷한 형체도 없이, 언제 오리라는 굳은 약속도 없이, 지금 여기를 조금씩 파괴시키면서 다가오고 있는 바로 그것. 나는 그들에게서 이야기되고 있는 사랑이, 희미한 잿빛 혹은 짙은 암흑에 가까운 어떤 것이 서서히 드러남과 같은 어떤 미지의 형태로 감지한다. 그러니까, 사랑은 때로 유령과 같이 출몰하여 일상을 뒤집고, 헤어 나올 수 없는 질병을 급속하게 감염시키는 무엇에 가깝게 여겨진다면. 어디에 있는가, 사랑은. 이 부서진 물음과 음울한 예감은 어쩌면 사랑에 관한 정의, 속성, 능력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하는 우리의 간결한 요구 앞에서 너무 허약하고 사랑만을 보여줄 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나는 눈빛을 나누고 살결을 애무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 이야기와 애써 거리를 두려 한다. 걷잡을 수 없는 마음 그대로를 표현하자면, 나는 눈물 섞인 신파조의 사랑이 싫은 것이고 아름답게 치장된 사랑의 두터운 베일을 무작정 걷어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비록 그동안 사랑이라고 불러온 것에 훨씬 근접하지 못한 것일지라도, 결여된 사랑의 파편에 불과해 보인다 해도, 그것이 우리 시대의 사랑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고 확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시대의 사랑을, 이렇듯 이미 사랑할 수 없는 자들이 겪고 있는 상실과 무기력, 불안과 두려움, 파괴와 저주 등으로부터 엿볼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두고 출발한다. 오직 기다림만이 있고 뚜렷한 목적어가 없는 사랑을 기다리는 지루함을 견디면서, 우리는 이런 물음에 다시 갇히게 될 줄 안다. 사랑은 있는가, 어디에.  
 
한순미, <세계를 사랑할 수 없는 자들>,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246-248쪽.  
한순미 외저,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감성총서 제9권] 우리시대의 사랑, 246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