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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룩거리며

애(愛)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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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느 날 돌발적으로 일어난 발작처럼 솟아나는 것, 그것은 익숙한 삶에 균열을 가하는 낯선 이방인이 도래하는 것과 같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진짜 양을 그려주는 일을 선고받은 한 남자. 그는 그녀가 원하는 진짜 양의 모습을 그려줄 수 있을까. 그녀의 욕망은 끝이 없고 그의 능력은 한없이 부족하다. 그와 그녀 사이에 놓인 그 끝없는 욕망과 결여를 중단시키는 힘은 먼 곳에 있지 않다. “항상 그녀의 특별함만을 생각해왔던 나는, 난생 처음으로 나의 평범함을 돌아”본다. 남자는 특별한 사랑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단지 평범함에 지나지 않았던 것임을 발견한다. 설령 그녀가 지닌 신성한 특별함이 결국 평범한 일상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자각한다 해도, 다시 말해 사랑이 아무리 평범한 것이라고 감추어 말한다 해도, 그 부정의 부정 속에서 사랑은 더욱 특별한 위치로 부각된다. 그 안에는 사랑이 곧 신비이며 평범한 일상과 대비된다는 이분법이 작동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일상을 다르게 변모시키는 힘이라는 것이라는 묵언의 동의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에게 부여되는 특권이며 우리가 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사랑 앞에서 한없이 부서지는 이유다. -눈물이 날 정도로 특징이 없었던 평범한 신발과 눈이 돌아갈 정도로 특별했던 장난감이 그려내는 구도가 어쩐지 익숙했다. 화려하지만 연약해서 부서지기 쉬우며 신발이 없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존재와 그 특별함을 묵묵히 뒷받침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지금의 그녀와 나였다.(오성용, 「집에 가, 어린 왕자」(2008)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착착 잘도 걸리는 병은 다 어디 가고 나는 이따위 병을 앓아야 하나, 그녀가 나를 싫어하는 것을 바라봐야 할 것이 확정된 나는, 이 형용할 수 없는 불행 앞에서 머릿속까지 머리 바깥처럼 피폐해지는 것을 느꼈다. 애초에,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그런 여자’의 요건에 대머리도 좋아하는 여자라고 써둘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고, 그것은 그녀는 왜 대머리를 싫어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으로 이어져 세상 모든 대머리들에 대한 동정으로 치우쳤다가, 이내 변질되어 모든 대머리가 아닌 사람들을 저주하게 되어 그녀의 삼촌들도 모두 다 대머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고, 까닭없이 그녀의 미용실에 있는 책의 제목을 떠올리며 그 끈을 놓았다. ‘지구에 꽁짜는 없다.’ 결국 그런 것이었을까? 나는 어쩐지 내가 이런 병을 앓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빌어먹을 지구가, 거의 거저 그녀를 얻은 댓가로 내게 머리카락을 지불하라며 독촉하고 있었다.(오성용, 「기다려, 데릴라-From 시하눅빌」(2008))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 후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된 한 남자. 어느 날부터 대머리 증상을 앓게 되고 “형용할 수 없는 불행 앞에서” 나날이 피폐해진다. 후회와 의문, 동정, 저주를 계속하다가, 그의 그런 감정들은 그녀의 미용실에 있는 ‘지구에 꽁짜는 없다’라는 책 앞에서 중지된다. 여기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이 빌어먹을 지구가, 거의 거저 그녀를 얻은 댓가로 내게 머리카락을 지불하라며 독촉하고 있었다”는 깨달음. 이것은 남자에게서 사랑과 행복을 앗아가는 이유를 ‘빌어먹을 지구’의 탓으로 여기고 그 분노와 저주의 대상을 지구 전체로 삼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서 당신을 빼앗아간 것은 당신과 내가 거주하고 있는 이 몹쓸 지구, 다시 말해 당신과 나의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세계 전체인 것이다. 에곤 쉴레 <자화상>, 1910.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당신, 내가 스스로 설계할 수 없는 세계, 나는 당신과 세계를 사랑할 수 없다는 완벽한 절망감. 당신이 사랑하는 목록 안에 내가 자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확인된 이후, 사랑받지 못한 자들의 지독한 상실감과 저주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사랑을 감싸고 있던 힘은 이제 세계 전체를 향한 증오와 분노로 번진다. 세계를 사랑할 수 없는 자들에 남겨진 일은 세계를 빈틈없이 증오하고 세계에 한껏 분노를 선사하는 것이다. 그 절망의 순간, 남자에게 남은 것은 죄책감과 “뚜렷한 적의”뿐. “마치 암호와도 같아, 그 누구도 알지 못할 신비로움으로 시작된 나의 사랑을, 그 기적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끝내버렸다고.” 불행에 빠진 남자는 대머리 이웃들의 격려 속에서 새로운 힘을 얻는다.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하는 외국인, 전쟁터에 있는 남편을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서 기도하는 베레니케라는 여인, 그리고 대머리 커플들에게서 위로를 받고 나는 이렇게 화답한다. “절대, 주눅들지 말게”(외국인) “명심할게요”(나)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세요.”(베레니케) “아무럼요”(나) “행복하세요, 행복하세요.”(대머리 커플) “노력할게요”(나) “그냥 믿어, 맷돌 돌리는 일도 생각보단 할 만해”(맷돌 돌리는 남자) “믿고 있어요”(나) “꼭 내가 아니라, 나의 자손과 그 자손과 또 그 자손 들이 너와 연결된 것이지” “지구에 꽁짜는 없단다.”(지구) “있잖아요, 꽁짜가 아니라 공짜예요 공짜.”(나) 그리하여 남자는 공짜가 없는 지구를 믿고 앞으로 “단지 생각 때문에 중단된 나의 이야기를 기적 같은 순간에 느낀 실감으로 다시 이어붙이는”일을 하리라 다짐한다. 사랑하는 당신은 언제나 “서가의 빈 공간”처럼 “서가에 꽂힌 책들과 항상 함께해 온 하나의 여백.”(오성용, 「32번 서가」(2013))으로 늘 그렇게 있어온 것이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직 채워지지 않은 이야기를, 즉 원래 있지 않은 이야기와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 너무나 새롭고 터무니없이 오래된 존재를 다시 기다리고 쓰는 것이다.  
 
한순미, <세계를 사랑할 수 없는 자들>,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260-263쪽.  
한순미 외저,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감성총서 제9권] 우리시대의 사랑, 260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