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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더듬이

애(愛)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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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타인에게 상처 자국을 내는 일이다. 사랑은 그런 점에서 타인과 이미 관계하고 있는 감정이다. 아니, 그것은 타인의 삶에 관여하고 개입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타인에게 말 걸기이며 그렇게 타인의 삶에 침투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부르자마자 더 멀리 사라지는 아득한 당신과, 내가 멀어지자마자 더 가까이 나타나는 섬뜩한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말이 있을까. 당신을 부르는 “내게 말은 붕괴된 조직이고 소멸된 유적이며 퇴화된 신경과도 같아. 혀 끝에 달라붙어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말은 이끼와도 같고 증발하고 흔적만 남은 얼룩과도 같”(정용준, 「떠떠떠, 떠」)은 것. 그러면 나는 어떻게 당신에게 말을 걸고 당신의 삶 속에 들어설 수 있을까.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모스부호 같았다. 음성은 끊어졌고 단어는 분절되고 해체됐다. 나의 언어는 조각조각 나뉘고 찢겨져 있어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어 있는 상태였다. 내가 겨우 그녀에게 들려준 말이라곤 떠, 떠, 떠, 밖에 없었다. 그때, 갑자기 그녀가 몸을 비틀었다. 눈을 뒤집으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아무 저항 없이 땅으로 추락하는 것들이 갖는 거침없음과 위태로운 속력으로 그녀는 침대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녀 옆에 무릎 꿇고 앉아 그저 아, 아, 아 소리를 내며 괴로워 했다. (…) 볼 수도 만질 수도 도와줄 수도 없는 저 먼 세계에서 그녀는 홀로 싸우고 있다. 나는 그녀의 벗은 몸을 내 옷으로 덮어주고 처음으로 그녀에게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많은 말을 할 수도 없고 단 한 마디도 정확히 발음되지 않겠지만 상관없다. 나는 말한다. 그녀는 듣는다. 떠, 떠떠, 떠떠, 떠떠떠, 떠, 떠, 아아, 아아아하아아, 아아아, 아, 사, 사, 사아, 아, 아아, 아아아, 라라, 라라라라, 라, 라라라, 아, 아아앙, 해.(정용준, 「떠떠떠, 떠」(2010)) 아무리 애를 써도 당신의 벌거벗은 고통을 위로할 수 있는 말들은 바깥으로 꺼내지지 않는다. 고통과 홀로 싸우고 있는 당신을 위해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는 저 막막함은 말의 능동적인 닫음이 아니라 말의 수동적 닫힘인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을 전하는 말들은 정확한 발음과 문장이 될 수 없는 것, 그것은 달리 말해 박탈된 언어다. 말이 닫힌 자리에서 겨우 더듬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나는 말한다. 그녀는 듣는다.” 나와 당신 사이에 놓인 단절을 지우고,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말의 장소는 어디에 있는가. 당신을 부르면 당신은 더 멀리 달아나고, 당신을 잊으려고 하면 당신은 이미 내 안에 가까이 와 있다. 사랑의 말들은 늘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랑의 언어는 단 하나의 뜻을 지닌 명료한 것일 수 없으며 당신을 만나러갈 때 동반되는 모든 말들 또한 기존의 언어 체계를 벗어난다. 그것은 일종의 풀리지 않는 기호와 신호 같은 더듬거림. -을은 풀리지 않는 기호와 오래된 신호 같은 것을 사랑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어떤 비밀을 밝혀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을은 그것을 따라가는 과정, 풀어내는 과정에 매혹되었을 뿐이다. (…) 을을 흥미롭게 하는 것은 동사의 변화나 다른 뜻을 일곱 개쯤 가지고 있는 같은 발음의 단어였다. 소통의 매개가 아니라 기호의 등가물이 되는 것들을 을은 사랑했던 것이다.(박솔뫼, 『을』(2010)) 당신에게 건네는 사랑의 말들은 을이 사랑했던 기호의 등가물처럼 동사의 변화나 다른 뜻을 일곱 개쯤 가지고 있는 동음이의어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 알 수 없는 말의 신비를 풀어내는 과정이나 마찬가지다. 기호의 등가물에 불과한 말들로 당신에게 마음을 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사랑의 말들은 당신에게 가 닿기도 전에 이미 언제나 다른 뜻으로 번역되고 만다. “공장 지대를 끼고 있는 도시”에서 매연이 뒤덮인 하늘과 수상한 기름 냄새를 맡았으며 “묵직한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자랐던 을이 “도시가 갖고 있는 기계적임에서 안정을 찾았”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들 그리고 우리들은 공장도시의 기계음처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민주’와 ‘을’이 만나고 사랑하는 과정은 어떤 한 점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순간의 반복으로 현상된다. 사랑은 세 점에서 한 점이 빠져나가거나, 두 점 사이에 한 점이 끼어들면서 세 점을 이루는 기이한 형태로 드러난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당신을 쓰는 것만으로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절절한 사랑의 노래와 이야기는 필요 없을 것이다. 당신을 노래하고 당신을 이야기하고 당신을 문자로 쓰는 순간, 당신은 내게 너무 또렷하게 드러나고 동시에 사라진다. 당신을 쓰는 순간 그곳에는 당신이 없다. 당신을 노래한다, 당신을 이야기한다, 당신을 쓴다, 당신은 침묵한다. 당신을 부르고 쓰고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당신을 만나기 위해 지속할 수밖에 없는 절차들임과 동시에 당신을 결코 만날 수 없다는 패배의 확인이다. -우리는 아직 백 행을 쓰고 있을까. 나는 굉장히 백 행을 쓸 수 있을까. 밀쳐진 자리에서 묻고 또 묻지만 그 질문은 전적으로 나를 찌르고 꿰어서 가는 실로 허공에 매단다. 우리가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이야기는 이미 끝났고 백 행은 어디서나 계속되는 것이라 죽은 너는 백 행을 쓸 수 없고 살아 있지 않은 나 역시 할 수 없다. 아직 쓰다 만 그것의 마지막 행은 무엇이었을까. 너와 살고 싶다거나 혹은 혼자 있고 싶지 않다거나일 그것은.(박솔뫼, 『백 행을 쓰고 싶다』(2013)) “백 행은 사라진 어떤 것. ‘어느 순간 홀연히’는 아니고 차차 모두가 잊게 된 어떤 것이다.” 그 백 행을 쓴다는 것은 “먼 곳에서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글자들이 모였다 사라진다. 죽음 후에야 이름을 찾는 사람들, 사는 동안 줄곧 없는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을 언제 어디서나 계속하는 일이다. 이제 우리에겐 당신을 말함으로써 혹은 말하지 못함으로써, 나아가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해지지 않음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는 것만이 남겨진 일이다. 백 행을 쓴다는 것은 그저 계속해야 하는 의무이고, 계속할 수 없다는 절망이며, 그럼에도 계속할 것이라는 맹세다. 간단하게 말해 백 행을 쓰는 일은 그저 무언가를 계속하는 것, 그것은 달리 말해 명멸(明滅)하는 ‘운동’이다. 바디우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세계에 대한 일종의 탐색이 무한히 계속되는 이러한 간격이다.” -말들이 있는 한, 그것을 말해야 한다, 말들이 나를 찾을 때까지, 말들이 나를 말할 때까지, 기이한 고통, 기이한 잘못, 계속해야 한다, 어쩌면 이미 그랬는지도 모른다, 말들은 이미 나를 말했다, 말들은 아마도 나를 내 이야기의 문턱까지 데려갔다, 내 이야기를 향해 열린 문 앞으로, 설마하니 그럴까, 만약 문이 열린다면, 그것은 나일 것이리라, 그것은 침묵이리라, 내가 있는 여기, 나는 모른다, 나는 결코 모를 것이다, 알지 못하는 침묵 속에서, 계속해야 한다, 계속할 수 없다, 계속할 것이다.(사무엘 베케트, 「이름 붙일 수 없는 것」(1949), 알랭 바디우, 서용순, 임수현 옮김, 『베케트에 대하여』) 백 행을 쓰는 것은, 베케트가 말하는 실패가 자신을 항상 해체해 가며 강인하게 지속하는 실천적 깨달음을 지칭하듯이, 말함으로써 애써 말함으로써 당신을 망각하지 않도록 하는 저항의 몸부림과 같은 것이 아닐까. 이때 말하고 쓴다는 것은 아직 곁에 여전히 살아 있는 당신의 기억을 지속적으로 말함으로써 그것을 온전히 비워내기 위한 일이다. 이렇듯 사랑의 말들은 처음부터 소모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던가. 혹은 말하지 못함으로써, 망각될 수 없는 것을 힘겹게 말한다는 것은 말할 수 있는 자로서의 자리를 다른 것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다는 절망의 승인이다. 언어를 박탈당한 자들은 이전과 똑같은 언어로 더 이상 사랑을 말할 수 없다. 사랑의 말들은 그렇듯 끝까지 문자의 죽음으로써만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말들의 소모 혹은 말들의 죽음을 견디면서 계속하는 것이다. 사랑은 결국 사라지는 것을 쓰고, 궁극에는 사라지기 위해 쓰는 것이다. 사랑 이야기가 왜 끝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도 지속되는지를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이미 죽은 채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소모함으로써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고, 아니 우리는 항상 이미 죽음을 견디면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존재라고. 이것이 바로 사랑의 언어와 우리 시대의 형상이 동근원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한순미, <세계를 사랑할 수 없는 자들>,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250-255쪽.  
한순미 외저,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감성총서 제9권] 우리시대의 사랑, 250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