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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파(內-破)

애(愛)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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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정용준의 「사랑해서 그랬습니다」는 그런 일반적인 사랑과 결별을 선언하고 있는 소설이다. 사랑의 일차적인 조건인 두 사람의 만남은 이 소설에서 매우 특별한 구도로 장치되어 있다. 사라와 그녀의 뱃속에 있는 태아가 그들인데, 이들에게 사랑은 아직 대면하지도 않은 채 일어나는 사건이다. 사라의 뱃속에 자라고 있는 태아에게 바깥의 세계는 불안, 두려움, 무서움을 주는 공간으로 감지된다. 태아는 앞으로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나게 될 경우, 사라와 자신이 어떤 사태를 겪게 될 것인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태아는 자신이 뱃속에서 “터지기 직전의 표면이 갖는 날카로운 긴장처럼 이제 곧 모든 것이 얇아지고, 팽창하고, 위태로워지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앎이 바로 “다른 방식과 방향”의 사랑을 결정한다. -사라의 깊숙한 곳에서 살아왔던 나는 사라를 잘 알게 됐다. 노크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확인한 이부터 내 마음은 사라의 결심과는 다른 방식과 방향으로 자라났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사라에게 어떤 존재인지, 무엇이 사라를 위한 것인지, 또 무엇이 서로에게 최선인지. (…) 너를 지켜줄게. 침대에 누워 잠들 때마다 중얼거렸던 사라의 고백 뒤에 숨은 두려움을, 자신의 배 속에 자라고 있는 정체불명의 생명을 무서워하는 어린 여자의 진심을 누구보다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사라의 좁고 좁은 산도를 통과하고, 빛을 보고, 사라의 가족을 만나게 되면, 나와 사라가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나는 어쩐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다는 것은, 누군가를 가장 많이 또 깊이 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많이 생각한 마음이다. 내 모든 것을 지금 멈추겠다. 사라를 사랑하기 때문이다.(정용준, 「사랑해서 그랬습니다」(2011)) 태아는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쩐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태아에게 사랑한다는 것은 다가올 모든 위태로움을 미리 아는 순간 스스로 다가올 모든 것을 멈추는 것이다. 태어나기도 전에 서둘러 스스로 생명이길 그쳐버린 태아의 죽음은 곧 정직한 삶의 실체를 예견한 자의 선택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많이 생각한 마음에서 행해진 결정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안다는 것’은 괴로움을 동반한 사랑, 아니 사랑보다 앞서 있는 괴로움 그 자체이다. 이것은 분명 사랑이 터져 오르는 열정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님을, 다시 말해 이 경우 사랑은 열정보다 더 앞선 무력함의 자각에서 출현한다. 사라를 사랑해서 태아가 결정한 다른 방식은 자신의 존재를 지우는 것이었다. 그로써 태아는 세계라는 실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조그마한 어둠 구멍을 낸다. 태아의 죽음은 ‘사랑’이란 문자를 결국 완성하지 못하게 하는 커다란 결여이며, 그것은 ‘사라’를 ‘사랑’으로 완성시켜 줄 수 있는 ‘o’과 같은 모음이 되길 거부하는 것이다. 태아가 존재하는 방향은 사랑이란 글자에 자리한 죽음의 흔적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라를 사랑해서, 너무도 사랑해서, 스스로를 지울 수밖에 없는 의도적 죽음. 그 이면에는 사랑을 거절하는 가족과 사회의 질서가 자리해 있다. 태아가 뱃속에서 선택한 죽음으로써 사랑하는 것과 우리가 무언가를 행하기도 전에 욕망의 거세를 강요하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재앙을 예감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을 바로 멈추는 방식으로, 즉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함, 그것이 이 세계를 견디는 극단의 한 자세가 아니었는가. ‘그랬습니다’라는 말은 그저 무기력하게 세계를 승인하는 마지막 말이 아니라 ‘사랑해서’라는 구체적인 이유와 더불어, 훨씬 더 커다란 의미를 획득한다. 태아는 스스로 자신을 지워버림으로써, 그럼으로써 사랑의 희생적 의미에 균열을 낸다. 죽음으로 이 세상을 멈추는 것, 법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적 힘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되지 않음으로써 무엇인가가 되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무엇인가를 하는 것, 즉 무능력의 능력을 지닌 자의 사랑이다. 바깥으로 열리기 전에 안으로부터 스스로를 파괴시킨 자들은 이전의 모든 일을 ‘그랬습니다’라는 한마디로 감당하는 무력함의 역능을 보여준다. 그러나 무능과 무력에 가깝게 보이는 그런 사랑은 모든 세계를 처음부터 거절하는 힘이다.  
 
한순미, <세계를 사랑할 수 없는 자들>,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248-250쪽.  
한순미 외저,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감성총서 제9권] 우리시대의 사랑, 248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