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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넥타이 부대의 등장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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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농성은 축제가 되기도 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박수를 보내고 호응했다. 애국가를 부르고 만세삼창을 반복했다. 주변 건물의 창문이 열리면서 시민들은 두루마기 휴지를 거리로 날려 보내고, 어떤 이들은 옥상에 올라가 손을 흔들기도 했다. 시민들은 담벼락을 통해 빵, 김밥, 돈, 의약품 등을 던져 줬다. 그만큼 상인, 시민, 사무원들의 농성에 대한 공감이 컸다. 이들은 지원과 동조를 넘어서 점차 시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5공 정권은 강경 진압으로 일관했다. 경찰은 6월 13일 국민운동본부 간부 13명을 구속했다. 민정당은 “6‧10 시위 이후 서울 명동 일대가 불순 폭력 세력에 의해 해방구로 선포된 데 대해 큰 충격과 우려를 금치 못한다.”는 논평을 내놓았다. 당시의 민심을 ‘불순 폭력 세력’으로 몰고자 했던 관성은 더 큰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시민의 시위 참여에 관해 당시 세계 언론은 이를 ‘중산층의 반란’이라고 표현했다. 명동성당 바깥의 열기가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11일부터 넥타이 부대가 시위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시민들의 반응이 뜨거워졌다. 명동의 상인들은 6‧10대회 날처럼 셔터를 내리고 학생들을 숨겨주기도 했고, “쏘지 마!”를 외치며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시민들은 경찰에게 연행되는 학생을 빼내 피신시키고 경찰과 대치하기도 했다. 그리고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려는 경찰을 에워싸고 몸으로 막았다. 이들은 이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자신의 의사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15일 여러 차례의 투표를 통해 해산이 결정되었다. 12시 20분 경 농성시위대는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성당을 빠져 나왔다. 성당 입구는 기자와 시민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운집한 시민들은 구호를 외치며 애국가를 불렀다. 해산식은 ‘명동투쟁 민주시민, 학생 일동’의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저희들이 농성을 푸는 가장 큰 이유는 명동투쟁에서 고양된 민주화투쟁의 열기를 민족민주운동 세력의 더욱 높은 연대투쟁으로 승화시켜 군부독재의 종식을 쟁취하기 위해서”임을 분명히 밝혔다. 카톨릭 사제단은 이들의 안전 귀가를 확인했다.  
 
류시현, <87년, 뜨거운 여름>,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32-233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232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