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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이한열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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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 전국의 2,191명의 발기인을 대표해서 150여 명의 각계인사들이 모였다. 국본은 야당과 각 부분별 모든 재야 민주화운동단체 그리고 종교계가 ‘호헌철폐’와 ‘직선제 개헌 쟁취’라는 최소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연합한 광복 이후 가장 큰 조직이었다. 민주대연합이 더욱 강고해졌다. 국본은 민정당의 후계자 지명일인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조작 범국민규탄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어디로 분출할지 몰랐던 분노가 함께 모인 뜨거운 여름으로 기억되는 6월 항쟁의 서막이 열렸다. 1987년 6월 9일 오후 2시 연세대 민주광장에서는 ‘구출 학우 환영 및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대 총궐기대회’를 열고 학과별, 단대별, 동아리별 학생들이 모였다. 민가협의 구속자 어머니들이 많이 참석해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전두환‧노태우의 화형식’을 마치고, 이들은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며 교문 밖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경찰이 쏜 직격탄을 맞고 이한열은 피를 흘리며 동료에게 부축을 받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 모습을 담은 사진은 <<중앙일보>> 사회면에 게재되었다. 언론 검열이 존재한 상황에서 이 사진은 시위를 부추길 수 있다고 곤란하다는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사진 부장이 보안사에 끌려갈 수 있는 상황까지 책임지겠다고 해서 신문에 실리게 되었다. 이 한 장의 사진은 대형 걸개그림으로 제작되었고, 학생들은 손수건과 스카프를 제작해서 국민들에게 배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희생은 더 이상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6월 9일 이전까지만 해도 민주화 투쟁의 승리에 대한 의구심이 팽배했지만 한열이가 뇌사상태에 빠져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공감대가 학생‧시민들에 확산되었다는 것, 그것이 도심 가두시위에 겁을 내지 않을 상황으로 이어졌다.(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 우상호의 증언) 이날 이후 학생들은 낮에는 시위를 하고 밤에는 병원 가서 이한열의 병상을 지켰다. 많은 시민들도 병원을 찾았다. 병원 식당 아주머니들은 경비 서는 학생들에게 식사를 준비해줬고, 신문도 비록 1, 2단의 작은 기사이지만 매일같이 이한열의 병세를 보도했다. 시위대열에서는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구호가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이한열의 입원소식은 그동안 시위에 관심 없던 일반 학생들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학생운동과 관계하지 않던 연세대 운동선수들도 단체로 병원에서 경비를 섰으며, 간호대 여학생들은 구급함을 들고 시위 대열에 참가해서 부상당한 학생들을 돌봤다.  
 
류시현, <87년, 뜨거운 여름>,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27-228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227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