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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커스장 풍경

노(怒)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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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의 <건너간다>에서 묘사되는 체념적 주체의 모습은 20세기 초 카프카의 짧은 소설 「맨 위층 값싼 관람석에서Auf der Galerie」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 소설에는 제목 그대로 맨 위층 값싼 관람석에서 서커스 공연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모습이 단 두 문장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길게 이어지는 각각의 문장에서 동일한 서커스장 풍경이 서로 상반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먼저 문법적으로 조건문(‘만약에~ 그렇다면’)으로 기술되는 첫 번째 서커스장 풍경에서 “폐결핵을 앓는 허약한” 모습의 여자 곡마사는 “채찍을 휘두르는 인정사정없는 단장”에 이끌려 쉼 없이 말을 타고 묘기를 부린다. “잠시도 그치지 않는 악대와 환풍기의 소음 속에서 이 곡예가, 잦아들다가는 새롭게 솟구치곤 하는, 기실은 피스톤인 손들의 갈채에 이끌려, 점점 더 크게 열려오는 잿빛 미래로 이어진다면….” 조건문의 긴 종속절은 최근 개봉된 영화 <설국열차>의 모티브를 연상시키는 다음과 같은 주절로 마무리된다. “맨 위층 값싼 관람석에 앉아 있던 젊은 관객 하나가 온갖 등급의 좌석을 모조리 지나는 긴 계단을 달려 내려와 공연장 안으로 뛰어들어 ‘그만!’ 하고 외칠 것이다.” 하지만 평서문으로 기술되는 두 번째 문장에서 서커스장 풍경은 반전된다. 여자 곡마사는 “붉고 희게 단장한 아리따운 여인”이며, 서커스 단장은 사랑스러운 자신의 손주딸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한 몸짓으로 그녀를 리드한다. 여곡마사가 “죽음의 대공중 도약”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단장은 “그 작은 여인을 버둥거리는 말에서 들어 올린 후 두 뺨에 입맞추고,” 그녀 자신은 “두 팔을 벌리고 작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그녀의 성공을 전체 곡마단과 나누고자 한다.”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맨 위층 관람석의 남자는 “아득한 꿈에 잠겨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시에 가까운 이 작품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가해질 수 있겠지만 우리는 앞서 논의해 왔던 음악적 표현과 관련시켜 소설 속 첫 번째 서커스장 풍경이 ‘민중가요의 시대’를, 두 번째 풍경은 ‘아이돌 그룹의 시대’를 은유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아리따운 여곡마사”가 그려지는 두 번째 서커스장 풍경은 우연히도 걸그룹이 득세하는 현재 한국의 주류 대중음악 풍경과 절묘하게 부합한다. 분노라는 감정과 관련하여 두 가지 풍경은 각각 ‘분노하게 되는 현실’과 ‘분노할 수 없는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고도 하겠다. 서커스장과 겹쳐 보이는 한국 사회 풍경은 민주화되었고 더 이상 착취와 적대적 관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화려한 ‘아이돌 문화,’ 말 그대로의 ‘우상의 문화’가 만들어 보여주는 친밀한 공동체의 이미지에 둘러싸인 우리는 소설 속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분노할 수 없는 것이다. 
 
최유준, <친밀함의 스펙터클을 넘어>,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98-202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198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