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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록수>와 박세리

노(怒)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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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은 역설적인 한 해였다. ‘단군 이래 최대 국난’이라 불리던 IMF 외환위기가 발생한 해이자 그 해 12월에는 과거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투사이자 정신적 지도자였던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된 해이기도 하다. 김대중의 집권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정점에 도달하는 듯했지만, 이후 외환위기를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국경 없는 금융자본의 유입과 신용카드 남발을 통한 부채 경제, 공기업의 민영화와 노동유연성 제고를 통한 평생직장 개념의 붕괴 등 신자유주의적 경제 시스템이 정착되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국민의 정부’를 표방한 김대중 정부는 집권 첫 해인 1998년 ‘제2의 건국’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리고 이 슬로건을 극적으로 수식하는 배경음악으로 <상록수>(김민기 작곡, 양희은 노래)가 선택되었다. 1970년대에 작곡된 이 노래는 특히 1980년대 대학가의 집회 현장에서 널리 불렸던 민중가요의 하나였다.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라는 1절의 가사는 군사독재에 대한 분노와 민주화를 향한 양심적 시민의 결의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1998년 광복5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공보실(현 국정홍보처)에서 제작한 텔레비전 공익광고의 배경음악으로 쓰이게 되면서 <상록수>라는 노래의 정서적 기능은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 공익광고 영상에는 당시 US 여자오픈골프대회에서 한국 선수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한 골프 선수 박세리의 이른바 ‘맨발 투혼’ 장면이 담겼다. 이 영상은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국가주의적 메시지를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함으로써 커다란 대중적 호응을 얻어냈다. 광고 영상에서 <상록수>의 가사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는 박세리의 골프공이 연못(워터해저드)에 빠지는 순간과 결합되었고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는 그녀가 양말을 벗고 연못에 들어가 골프공을 필드로 내보낸 뒤 마지막 우승 샷을 쳐내는 극적인 순간을 노래했다. <상록수>가 더 이상 저항적 민중가요가 아니라 국정홍보의 건전가요 내지는 세계화 시대의 자기계발 논리를 전파하는 신자유주의적 찬가로 재탄생하는 장면이었다. 최대한 선의로 해석할 때 그것은 민주화의 역사적 과정을 수용한 새로운 시민 주체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어느 경우든 이 노래의 정서적 기능은 크게 변화했고 분노의 감정이나 저항적 몸짓과의 연결점을 상실하게 되었다. 민중가요의 제도적 청산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져 갔다. ‘제2의 건국’을 통해 탄생한 새로운 시민 주체란 사실상 ‘신자유주의적 주체’,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 혹은 분노할 수 없는 주체였던 것이다. 
 
최유준, <친밀함의 스펙터클을 넘어>,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96-198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196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