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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몽의 역사, 야만의 역사

노(怒)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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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과 <지슬>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의 폭력성을 재현하는데 중심이 놓여 있다면, 박동훈 감독의 <계몽영화>는 3대에 걸친 한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긴 시간을 담고 있는 시대극이다. “정씨 집안 3대를 구성하는 인물들을 통해 그들이 그들의 시간을 어떤 태도로 대면하는지, 그리고 그 태도가 다음 세대로 전이되어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는지 목격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처럼, <계몽영화>는 일제강점기의 정길만, 유신시대의 정학송, 현재의 정태선이라는 세 인물을 통해 한국의 왜곡된 근대화 과정이 이들의 삶에 미친 영향 관계를 추적해간다. 먼저 1965년 서울. 학송과 유정은 ‘국제중앙’이라는 멋진 이름의 다방에서 데이트를 한다. 어색하게 마주앉은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곧 낯선 역사의 두 지점과 마주하게 된다. 하나는 6‧25 전쟁의 기억. 마치 시합을 하듯, 전쟁 당시의 끔찍했던 광경들을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무조건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른 하나는 1960년대 근대화의 풍경. 특히 프러포즈를 하는 장면에서 학송은 삼양라면, 양옥집, 미국유학, 티파니 반지 등 ‘국제’적인 물건들을 내세워 자신의 부유함으로 유정을 설득하고, 그녀 또한 이것에 굴복한다. 이렇게 영화는 학송과 유정의 긴 대화 장면을 통해, 1960년대의 근대화, 이른바 “잘 살아보세”라는 표어 아래 전쟁의 기억이 아로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다음은 1931년 경성.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다니며 조선의 농민들을 대상으로 토지를 매입하는 일을 하는 길만은 자신의 일에 대해 끊임없이 갈등한다. 한 농민에게 소작료를 내지 않으면 순사를 데려오겠다고 협박하던 길만을 농부의 다섯 아이들이 낫으로 마구 찌르는 꿈, 그리고 그 꿈에서 깨어난 길만의 눈에 이제 막 태어난 아들 학송이 들어오는 장면은 친일 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길만의 갈등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끝내 길만은 그 농민의 토지를 매입하고,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던 눈으로 허겁지겁 옥수수를 먹고 있는 농부의 다섯 아이들을 바라본다.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학송의 부유한 환경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길만의 친일 행동으로 구성되었다는 것, 따라서 학송의 부유함은 당시 토지를 빼앗긴 아이들의 가난함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후 영화는 1983년 서울, 태선의 이야기로 이동한다. “무조건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치관으로 유신시대를 지나오면서 학송은 알코올중독의 폭력적인 가부장의 모습으로 변한다. 태선이 학교에서 찍은 단체사진을 보고 “왜 구석에 서 있어? 가운데 있어야지, 그러다 너 낙오자 된다”고 화를 내는 학송의 모습은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 사회가 요구했던 삶의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상사에게 뇌물을 건네고, 아들에게 불법과외를 시키며, 유산을 두고 친척들과 싸우는 가정에서 태선은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태선이 최루탄이 뿌려진 길을 무거운 술병을 들고 걸어오는 장면이나, 카라얀의 공연을 녹음하다 초경을 경험하고 녹음을 다 못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뺨을 맞는 장면은, 80년대 신군부와 가부장의 폭력을 유비하면서, 이것이 그녀의 삶에 어떤 상처를 남기게 되는지를 암시한다. 이 영화의 제목이 ‘계몽영화’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정씨 가족 3대의 삶을 통해 바라본 한국의 근대화는 ‘계몽’의 이름으로 진행되었으나, 결국 ‘야만’의 과정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그 시대의 권력에 빌붙고, 사회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 다른 이들을 밟고 일어서야 했던 삶의 태도가 세대를 거쳐 이어지고 또한 심화되는 과정은 한국 사회가 지닌 기이한 연속성을 목도하게 만든다.  
 
강소희.주선희, <영화는 어떻게 역사를 기억하는가?>, <<우리시대의 분노>>,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84-186쪽. 
최유준 외저, <<우리시대의 분노>>, 감성총서 8,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8권] 우리시대의 분노, 184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