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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노라’ 나혜석

애(愛)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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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조선인의 연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아마도 번역서 <<인형의 >>이 아닐까 싶다. 입센의 작품 등을 통해 수입된 연애는 서양의 근대 가치에 대한 반성의 산물로, 잃어버린 개인에 대한 성찰이었으며 이상적인 사랑 그 자체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었다. 곧 서양의 연애는 근대적 자아의 각성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현실 생활에서 연애하는 것은 곧 독립된 근대적 개인의식의 성숙을 의미했다.<<인형의 >>이 미친 영양은 실로 대단했으며, 조선의 노라라 할 만한 여성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나혜석이었다. 여자도 참된 사람의 값을 가져야 된다는 나혜석은 생각했다. 독립된 개인으로서 상징인 자유연애에 대한 그녀의 신념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1934년 그녀는 이른바 「이혼고백서」라는 글을 쓴다. 나혜석은 약혼과 결혼, 이혼에 이르는 과정과 최린과의 관계를 고백했다. 또 그녀는 이혼녀에게도 성욕이 있으나 ‘정조를 고수하는 것보다는 재혼 할 때까지 중심을 잃지 말자는 것’이라며 여성에게 금기시 된 성욕이라는 성역을 건드렸다(이덕일, <<세상을 바꾼 여인들>>). 그림 나혜석의 「이혼고백서」(<<삼천리>>, 1934) 나아가 그녀는 조선 남성을 다음과 같이 조롱했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한다. 남이 정조를 지키도록 이끌어내는 만큼 그 정조를 지키도록 하는 것도 보통의 인정이지 않는가. 종종 방종한 여성이 있다면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는 말살시키고 꾸짖어 비난하는 일이 많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이혼고백서」, <<삼천리>>). 그녀는 또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닌 오직 취미이며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이 아니라고 자신에 대한 남성위주 사회의 비난에 정면 대응했다(「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나혜석의 주장은 “정조는 도덕 이상으로 존귀하다”(「序文」, <<人及ぴ女として>>)는 일본인 요사노 아키코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아키코에 따르면 여자들에게는 정조를 요구하면서 남자에게는 전혀 정조문제를 묻지 않는 것도 정조를 도덕의 기준으로 잴 수 없는 하나의 큰 이유가 된다. 이렇게 모순이 생기므로 정조를 도덕으로 생각하여 인간을 다스릴 수 없다. 따라서 정조는 도덕이 아니고, 취미이고 신앙이며 결벽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취미와 신앙은 도덕 이상으로 아름답기 때문에 그것을 존중해야 했다(장징, 앞의 책).  
 
김창규, <사랑의 역사적 흔적들>,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63-65쪽.  
한순미 외저,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감성총서 제9권] 우리시대의 사랑, 63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