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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씨지벽(和氏之璧)

애(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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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지벽(和氏之璧) 
《한비자(韓非子)》 〈화씨편(和氏篇)〉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중국 전국시대 때, 초(楚)나라에 화씨(和氏)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옥을 감정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초산(楚山)에서 옥돌을 발견하여 여왕(厲王)에게 바쳤다. 여왕이 옥을 다듬는 사람에게 감정하게 하였더니, 보통 돌이라고 했다. 여왕은 화씨가 자기를 속이려 했다고 생각하여 발뒤꿈치를 자르는 월형에 처해 그는 왼쪽 발을 잘랐다. 여왕이 죽고 무왕(武王)이 즉위하자, 화씨는 또 그 옥돌을 무왕에게 바쳤다. 무왕이 옥을 감정시켜보니 역시 보통 돌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무왕 역시 화씨가 자기를 속이려 했다고 생각하고는 오른쪽 발을 자르게 하였다. 무왕이 죽고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화씨는 초산 아래에서 그 옥돌을 끌어안고 사흘 밤낮을 울었다. 나중에는 눈물이 말라 피가 흘렀다. 문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를 불러 “천하에 발 잘리는 형벌을 받은 자가 많은데, 어찌 그리 슬피 우는냐.”고 까닭을 물었다. 화씨가 “나는 발을 잘려서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옥을 돌이라 하고, 곧은 선비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하여 벌을 준 것이 슬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문왕이 그 옥돌을 다듬게 하니 천하에 둘도 없는 명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이 명옥을 그의 이름을 따서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그후 이 화씨지벽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손에 들어갔는데,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이 이를 탐내 15개의 성(城)과 맞바꾸자고 하는 바람에 양국간에 갈등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에 연유하여 화씨지벽은 ‘연성지벽(連城之璧)’이라고도 불렸다. ‘화씨지벽’은 또 ‘변화지벽(卞和之璧)’ ‘화벽(和璧)’이라고도 한다. 이 고사는 한비자가 전국시대의 어리석은 군주들을 깨우치기에 유능한 법술가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화씨의 구슬을 비유로 들어 설파한 것이다. 사실 구슬은 처음에 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빛을 발하면 이미 차지하기 어렵다. 한비자는 우매한 군주의 인물 알아보기의 어려움과 지조 있는 선비들의 처신하기 어려움을 화씨의 구슬에 빗대어 이야기한 것이다.  
『한비자(韓非子)』, 「화씨편(和氏篇)」 
[네이버 지식백과] 화씨지벽 [和氏之璧]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