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년 12월 4일 을축에 내 누이 유인(孺人) 김씨(金氏)가 젖병[乳病]으로 병석에서 죽었는데, 6일 뒤에 그가 낳은 딸도 죽었다. 아, 슬프다. 사람이 50세 이전에 죽는 것을 요절이라고 하는데, 지금 내 누이는 겨우 16세이다. 그가 죽은 것은 아이를 낳아 기르다가 그렇게 된 것인데 끝내 아이도 보존하지 못하였으니, 아, 어쩌면 그리도 혹독하단 말인가.
내 누이는 나면서부터 정신이 맑고 깨끗하여 지혜가 특출했으니, 어려서부터 모든 언행이 어른 같았고 자라서는 더욱 완전해져서 덕스러운 기운이 충만하였다. 그리하여 그 깨끗함과 고매함은 어떤 것으로도 더럽히지 못할 정도이면서도 인자함으로 남을 사랑하고 온후함으로 포용하였으니, 부덕(婦德)에 있어 미비한 점이 없었다. 그 때문에 부모님이 누이를 특별히 사랑하셨다.
우리 형제는 장부가 여섯이고 누이는 고명딸이다. 그러나 그가 사내가 아님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는 총명함이 남들보다 뛰어나서 보고 들은 것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잊지 않았다. 우리 형제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혹 오래된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 것이 있으면 늘 누이에게 묻곤 하였다. 그러면 누이는 즉시 그 일을 식별해 내고 “아무 날 아무 시에 있었던 일의 곡절이 이러하다.”고 말하였는데, 그 말을 천천히 따져 보면 열에 두셋도 틀리지 않았다. 우리 형제들은 그의 총명함을 아껴서 시서(詩書)를 가르쳐 주려고도 해 보았지만, 그는 번번이 사양하여 배우려 하지 않고 오직 바느질 같은 여자의 일에만 힘을 쏟았다. 그러면서도 간혹 옛사람의 아름다운 언행을 일러주면 싫증을 내지 않고 듣기를 좋아하였다.
우리 집은 평소에 일이 많았고 또 어머니는 지병이 심하여 병석에 누워 계시는 일이 많았다. 누이는 8, 9세 때부터 벌써 어머니를 도와 자루와 상자 안의 자잘한 물건까지도 빠뜨리거나 흘리는 일이 없게 하였고 간혹 살림을 대신 맡아보기도 하였는데 그 역시 거뜬히 잘 꾸려나갔다. 우리 형제들이 각기 장가를 들어 집안에 들어온 부인들은 장단점과 성미가 각기 달랐으나 누이는 한결같이 사랑과 공경으로 대하여 털끝만치도 차별하지 않았다. 이에 그 부인들도 감동하여 누이를 좋아해서, 누이가 죽자 친정 부모의 상에 곡하는 것보다 더 슬프게 곡하였다. 아, 누이는 이처럼 어질었으니, 이 어찌 장수와 복록을 누릴 만하지 않다 하겠는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창협이 이섭에게 시집가 출산의 후유증으로 죽은 누이에 대한 애사로 망자에 대한 그리움과 애통함을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