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양은 동주(洞州) 사람이며 천추 태후(千秋太后) 황보(皇甫)씨의 외족(外族)이었는데 성정이 간교하고 성욕이 몹시 강했다. 김치양은 일찍이 머리털을 깎고 가짜 중이 되어 천추궁(千秋宮)에 출입하면서 추악한 소문이 자자하였으므로 성종(成宗)이 그것을 확인하고 곤장 쳐서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목종(穆宗)이 즉위한 후 김치양을 소환하여 합문 통사 사인(閤門通事舍人) 벼슬을 주었다. 이후 몇 해 안 되어서 왕의 존중과 총애가 비길 바 없이 되어 벼슬이 뛰어올라서 우복야 겸 삼사사(右僕射兼三司事)로 되었고 백관의 임명 철직이 모두 그의 수중에 달려 있었으며 친척과 도당을 요직에 포치해서 세력이 일국을 좌우했으며 뇌물을 공공연히 받아 먹었다. 그리하여 자택을 3백여 간이나 되게 짓고 대(臺)와 정자, 정원, 연못 등을 지극히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며 놓고 밤낮으로 태후와 함께 놀면서 기탄하는 바가 없었다. … 목종이 항상 그를 내보내고자 하였으나 모친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고 단행하지 못하였다. 그 후 태후가 아들을 낳았는바 그것은 김치양과 간통하여 낳은 것이었다. 그래서 김치양은 태후와 함께 그를 왕의 후계자로 만들려고 기도하면서 대량군(大良君)을 꺼리어 강제로 중(僧)으로 되게 하였고 여러 번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그 후 김치양은 왕이 병석에 누워 있는 틈을 타서 정변을 일으키려 하였는데 유충정(劉忠正)이 상소하여 고발하였으므로 왕이 채충순(蔡忠順)을 불러서 밀의한 후 갑자기 대량군(大良君)을 맞아 오게 하였다. 김치양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며칠 동안 망설이고 있었는데 강조(康兆)가 왕을 폐립(廢立)하면서 군사를 파견하여 김치양과 그 아들을 죽이고 그 도당을 섬(島)으로 귀양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