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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로 키운 사랑스런 외아들을 나라에 바친 명예로운 어머니들의 감격의 눈물 좌담회(1939.6)

애(哀)
부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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森川: 아들이 7살 때부터 혼자서 키우셨다죠?
村井: 예. 농사를 지으며 짬짬이 우산이나 돗자리를 열심히 만들면서요. 사내아이라서 상업전문학교까지는 반드시 마쳐야 한다 생각하고 분발했죠. 제멋대로 키우긴 했습니다만, 아무쪼록 편모슬하라고 손가락질 받지 않게 하려고 있는 힘을 다했죠.
斎藤: 우리 아들은 동원이 걸려오면, “천자님께 목숨을 바쳐야지, 바쳐야지”라고 언제나 말하곤 했죠. 이번에 소망하던 대로 명예롭게 전사를 했습니다.
森川: 흰 오미코시(御神輿)가 야스쿠니신사에 들어온 밤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되뇌이며 가슴이 뭉클했어요. 변변치 않은 우리 아이를 그나마 천자님을 위해 쓰이게 해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村井: 모두 천자님 덕분이죠. 황송할 따름이에요.
中村: 다들 눈물을 흘렸죠.
高井: 기쁨의 눈물이었어요. 기쁠 때도 눈물이 나오니까요.
中村: 우리들 따위에게, 폐하를 위해 쓰일 아이를 주셨으니 정말로 고마운 일이죠. 아 나팔이 울렸죠. 군인이 불었어요? 하구루마(羽車)가 들어올 때 울린 나팔 소리는 뭐라 표현할 수가 없더군요. 그저 감사할 뿐이에요.
森川: 정말로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좋은 소리였죠. 그런 훌륭한 오미코시에 넣어주셔서……. 우리 아이는 정말로 행복한 아이라고 생각해요. 보통은 그런 식으로 제사를 지낼 수가 없지요.
斎藤: 천자님께서도 참배해주셨어요. 절도 받았구요.
中村: 정말로 더할 나위 없는 경배를 받았죠. 황송하게도.
斎藤: 저는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언제나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어요. 천자님이 우리를 가엾게 여겨 보리밥을 드시면서까지 수고를 해주신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해서든 꼭 보은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천자님께 절을 올릴 때 저는 눈물이 흘러서 주체를 할 수가 없었어요. ‘야스쿠니님’께 참배할 수 있었고, 천자님께도 절하고, 나는 이제 여한이 없어요. 오늘 죽어도 만족이에요. 웃으며 죽을 수 있어요.
中村: 또 오늘은 신주쿠교엔이라는 곳을 구경했죠. 정말 어쩌나 고맙던지. 아들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제사지내 주시고, 훌륭한 곳도 보여주시고…….
斎藤: 꽃이 많이 피어 있더군요. 넓디넓은 정원에, 극락과 같은 곳이더군요.
高井: 아들도 저승에서 기뻐해줄 거예요. 죽는 방식이 좋았죠. 우는 얼굴 따위를 보여서야 천자님께 죄송하죠. 모두 나라를 위해서인데. 안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로 언제나 기운이 넘치죠.
中村: 정말로 그렇죠. 이제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쓸쓸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나라를 위해 죽어 천자님께 칭찬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릴 만큼 기뻐서 기운이 나죠.
森川: 변변치 않은 우리 아이인데, 그래도 써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중일전쟁 시기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야스쿠니신사의 제례를 마친 후 한 자리에 모여 나눈 대담의 일부이다. 아들을 잃었음에도 그 슬픔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이를 기쁨으로 전환시키는 야스쿠니신사의 감정의 정치가 잘 드러나는 기사이다. 야스쿠니제사는 그 아들들의 죽음을 영광스러운 죽음이라고 현창하면서, 유족들이 슬픔을 표출하는 것을 억압한다. 정당한 애도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만성적인 우울상태이다. 얼핏 보면, 그들은 야스쿠니제사를 통해 위로를 받고, 슬픔을 푼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을 억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엉켜 있다.  
{주부의 벗主婦之友} 1939년 6월호 
高橋哲哉, 2005, {靖?問題}, 東京:筑摩書房.
이영진, 2012, [전후 일본의 특공위령과 죽음의 정치],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