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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미카제 특공대 위령식에 참석한 한국인 유족

애(哀)
부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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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 바다에서 산화한 특공대원의 영을 위무하는 치란특공기지 전몰자추도식이 카와베군[川辺郡] 치란쵸[町]의 특공관음당에서 열렸다. 올해는 39년 만에 한국인 특공대원의 유족이 출석, 특공 아주머니 토리하마 토메(81세)와 눈물의 대면을 했다. 한국에서 참례한 유족은 구(旧)육군항공대특별조종견습사관 1기생으로 미야자키현 닛타바라[宮崎県 新田原]에서 출격한 유키 쇼키치[結城尙弼, 본명 김상필[金尙弼]) 대위의 형 김상렬(金尙烈, 68)씨, 김태순(金泰順, 원 이름은 여태순[呂泰順]으로 신문기자의 착오로 보인다/인용자 주) 씨(57) 부부, 그리고 같은 1기생으로 치란에서 출격한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 소위(본명 탁경현[卓慶鉉])의 유족대리 박병식(朴炳植, 64세)씨 3인 … 마에다[前田] 회장 등의 안내로 식장의 옆에 위치한 특공유품관을 견학한 3인은 전시되어 있는 두 대위의 영정을 찌르는 듯이 응시하며 감개무량. … ‘아우의 영에, 형이 찾아왔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말하는 김상렬씨도 감정이 극해 달해 분향대 앞에 엎드려 오열. 전국에서 참가한 약 7백 명의 유족들도 함께 흐느껴 울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가미카제 특공대원 중에는 상당수의 조선인들도 속해 있었고, 그 중 일부는 특공으로 출격,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다. 식민지 말기 이들은 총독부에 의해 조선의 영웅으로 미화되었지만, 해방 이후에는 가장 악질적인 친일파로 전락, 유족들은 그들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애도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위 자료는 1984년 가고시마 치란에서 열린 특공 위령제에 한국인 유족이 처음으로 참석했던 상황을 보도한 지역신문 기사이다. 태평양전쟁 말기 특공대원으로 차출되어 목숨을 잃은 동생의 죽음에 대해 살아남은 형이 육친의 슬픔을 호소하고 있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특공대원이었던 동생의 죽음에 대해 정당한 애도를 해주지 못했던 형이 일본 가고시마에서 치러진 위령제에 참석해서 오열하고 있다. 자료 자체만 본다면 정당한 애도를 통해 슬픔이 해소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생의 죽음을 앗아간 일본에서 열리는 특공대원 위령제에 참석해야 하는 형의 심정은 복잡다단한 것이다.  
{南日本新聞}(1984.5.4) 
이영진, 2011, [조선인특공대원이라는 물음: 위령과 기억을 중심으로], {차세대인문사회연구}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