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 방극지의 부음을 들었다. 아! 극지가 죽었구나! 천명인가, 운명인가. 이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하늘의 도는 믿기 어려움이 진실로 이와 같은가. 극지의 이름은 처인이며, 기유년(1549)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과거 공부를 하여 병자년(1576)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과감하게 길을 바꾸어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두어, 내암. 한강 두 선생을 사사하였다. 배우기를 힘쓰고 뜻을 돈독하게 하여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홀연히 속세를 벗어날 생각이 있어서, 지리산 아래 악양의 남쪽 하천 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우뚝하게 단정히 앉아 절차탁마하고, 학식 없는 선비들 가르치기를 오래 해도 따분해 하지 않았으며, 참된 성품을 기르면서 산에 살아도 마음은 천고에 노닐었다. 많은 책을 두리 읽고 의리를 연구하되 물이 스며들듯 매번 부모님을 일찍 여읜 아쉬움을 탄식했으며, 50살이 되어서도 더욱 부모를 그리워하였다. 형을 공경히 섬기어 우애가 지극하니, 남이 이간질하지 못하였다. 항상 나에게 말하길, 나는 산중에 복거하여 오래도록 백씨를 떠나 있으니, 산을 버리고 돌아와 한 집안의 즐거움을 이루느니만 못하다고 하였다. 효도하고 우애하는 마음을 밥 먹고 휴식하는 동안에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사년(1593)의 난리에 적이 진주성을 함락하자 산속에 깊이 들어갔는데, 조그마한 초가집마저 적에게 불타버리자 가족을 이끌고 여러 번 피하여 두류산에 들어갔다가, 반야봉으로부터 운봉을 거쳐 백전에 도착했다. 이때 나 역시 피난하여 백운산으로 갔다가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구원인을 만난 듯이 반갑게 위로하고 탄식하며 속마음을 숨김없이 서로 털어놓았다. 그래서 백운산 자지동에 복거하기 위하여 산경을 다시 찾았는데, 볼만한 곳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에게 말하기를, '이는 나의 만녀 사업이다. 그대도 함께 하자.'라고 하였으니, 곧 그의 천성이 산수를 좋아하고 속세의 시끄러움을 싫어했기 때문다. 집안 사람의 생계를 돌보지 않아서 가난한 생활에 끼니를 자주 걸러도 편안히 여기고 괘념하지 않았다. 가난에 처하여도 즐겁고 곤궁에 처하여도 형통한 것은, 그를 옛사람과 견주어도 짝할 만한 이가 드물 것이다. 을미년(1595) 봄에 처자를 이끌고 구례현으로 가서 타관살이를 한 지 반년만에 역질이 크게 번져, 집을 수 차례 옮겼다. 구례의 수령은 본래 친분이 있었으므로 그를 객관에 맞이해 들였다. 곧이어 창옹에 걸려 6월 18일에 공관에서 죽었다. 아! 슬프도다! 넓고 씩씩한 도량과 탁월한 식견, 굳센 논변, 우뚝한 모습을 이제 다시 볼 수가 없으니, 친구를 잃은 슬픔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세상이 어지럽고 길이 멀어 또한 달려가서 곡하고 염습할 수도 없으니, 더욱 남쪽을 바라만 보고 오열하는 지극한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다. 겨우 그 언행의 대강만 기록하지만, 공의 평생 공력에 대하여서는 반드시 이를 잘 기록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