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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을 주장했으나 실패로 돌아가다.

애(哀)
부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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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은 “개경은 이미 왕업이 쇠한 데다 궁궐마저 다 불타버리고 남은 것이 없으나 서경은 제왕의 기운이 있으니 임금이 옮겨가 상경(上京)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14년(1136)에 정예군 1만여 명을 선발하여 세 갈래로 진공하니 적병이 완전히 궤멸되었다. 조광이 어찌 할 바를 몰라 온 집안 식구와 함께 스스로 불타 죽으니 서경이 평정되었다. 묘청·백수한·정지상·유참·조광(趙匡) 등의 처자식을 모두 적몰(籍沒)하여 노비로 삼았다. 
묘청은 지덕이 쇠퇴한 곳에서 왕성한 곳으로 도읍을 옮겨야만 왕실과 국가가 융성해진다는 이른바 ‘지덕쇠왕설(地德衰旺說)’은 고려 태조 이후부터 거의 모든 고려 왕들이 신봉했던 풍수론이었다. 묘청은 보수적이고 무기력한 구세력의 근거지 개경을 떠나 새로운 국가 질서를 확립하고 싶어 한 왕과 신세력들과 함께 혁명적인 계획을 구상함으로서 주도권을 잡으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나아가 그는 칭제건원과 금국정벌까지 주장하기에 이른다.
인종은 초기에는 묘청의 이와 같은 계획을 지지하면서 서경의 신궁으로 행차하였다. 그러나 서경행에도 불구하고 천재지변이 끊이지 않자 김부식을 비롯한 개병파들은 본격적으로 인종의 서경행을 저지하고 나서면서 인종도 서경 거동을 포기하게 된다.
이에 1135년 묘청은 서경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고, 김부식을 중심으로 하는 진압군에 의해 반란을 일으킨 지 1년 만에 함락되고 만다. 묘청과 함께 반란에 참여한 이들은 불 속으로 뛰어들어 자결하거나 목을 매 자살하였다. 서경천도운동에 가담한 이들 모두가 비극적인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내용이다.  
고려사 열전, 고려사절요 
{고려사}, {고려사절요}
송은명 지음, {인물로 보는 고려사}(시아, 2009), 164-177.
이기백, {개정판 한국사신론}(일조각, 1989), 167쪽.
邊太燮, {한국사통론}(삼영사,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