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을 대정(大庭)에 모아, 노산군(魯山君)과 신비(愼妃)의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하는 일을 문의하였다.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삼가 《실록(實錄)》의 등본(謄本)을 보건대, 노산군(魯山君)으로 위호(位號)가 강등(降等)된 것은 송현수(宋玹壽)의 변고(變故)가 있은 뒤의 일이었습니다. 그 후 중종(中宗) 때에 노산군에게 후사(後嗣)를 세워 주는 문제를 의논했는데, 상신(相臣) 정광필(鄭光弼)이 말하기를, ‘후세에서는 경솔하게 의논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습니다. 후사를 세워 주는 문제에 있어서도 오히려 그와 같았는데,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하는 일은 그것이 어떤 예전(禮典)인데 이제 도리어 경솔하게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신비(愼妃)를 복위(復位)시키는 논의는 김정(金淨)과 박상(朴祥)의 의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는 중종이 당저(當宁)해 있었고 곤위(壼位)가 바야흐로 비어 있었는데, 그때 승정원(承政院)에 내린 하교(下敎)에 이르기를, ‘이것은 큰 일인데 어찌 대신(大臣)의 말을 듣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그 이후에는 일찍이 위호를 추상하는 논의가 조정에 들리지 아니하였는데, 그것은 어찌 그 사체와 예절(禮節)이 김정이 상소했을 때와 같지 아니하여서 그러한 것이었겠습니까? 예(禮)로써 따지면 분명한 문자와 정확한 증거를 근거삼을 만한 것이 없고, 일로써 따지면 진실로 조종조(祖宗朝)의 처분에 관계됩니다. 조주(祧主)를 영녕전(永寧殿)에 곧바로 올리는 한 문제는, 송(宋)나라의 곽후(郭后)의 일을 유창(劉敞)이 의논한 것과 그 미안하고 대처하기 어려운 것이 마치 오늘날 의논하는 자의 논의와 같으니, 더욱더 십분 신중하여 지당(至當)하게 되도록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세백(李世白)은 말하기를, “노산군(魯山君)이 선위(禪位)했을 때의 일은 대체로 시골 마을의 아낙네와 어린이들도 지금까지 슬퍼하고 있으니, 이는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이 스스로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전대의 제왕(帝王)은 비록 선위한 이성(異姓)의 임금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 위호를 추후하여 깎아내린 일이 없으며, 명나라의 일도 예를 삼을 만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 현재 제기되고 있는 숭봉(崇奉)의 논의도 마땅히 다를 것이 없습니다만, 다만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한 일에 관계된 것이므로, 신자(臣子)로서는 쉽게 입을 열 수가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신비(愼妃)의 일에 이르러서는 본래 중종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며, 김정(金淨) 등의 상소를 살펴보면 공의(公議)의 소재(所在)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있어서는 진실로 추복(追復)을 청하는 것이 당연하였으나, 후세에 있어서는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지금 제신(諸臣)들이 인용(引用)한 바의 유원부(劉原父)의 의논과 정이천(程伊川)의 말은 가장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입니다. 이렇게 추측해보면, 이제 와서 추거(追擧)한다는 것은 아마도 예(禮)의 정도(正道)를 얻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장(閔鎭長)은 말하기를, “수백 년 동안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그 두 일에 대해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어찌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본성(本性)에 있어서 속일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대(前代)의 고사(古事)에도 분명히 근거할 만한 것이 있으니, 위호(位號)를 추복하는 것은 계지술사(繼志述事)의 도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한 것으로서 역대의 임금이 서로 계승하면서 오래도록 거행하지 아니하였던 것인데, 하루 아침에 결단하여 시행하는 것은 아마도 미안함이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윤지선(尹趾善)은 질병으로 인하여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여, 사관(史官)이 명을 받들고 가서 물으니, 말하기를, “당초에 노산군(魯山君)을 강등(降等)시켜 폐위(廢位)시킨 것은 성삼문(成三問) 등 여섯 신하의 일에서 비롯된 것인데, 성상께서 이미 그 신절(臣節)을 포상하셨으니, 그들의 옛 임금에 대해서 다시 혐의를 남겨둘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경태제(景泰帝)의 위호를 추복시킨 것과 대략 서로 비슷하니, 그것이 또 옛 예로서 충분히 증거가 될 만한 것입니다. 신비(愼妃)의 일에 이르러서는 그 폐위를 계청했을 때에 중종(中宗)께서 상당히 난처한 뜻을 보였으며, 《실록(實錄)》에 기록된 것만 해도 충분히 고증이 되어 믿을 수가 있으니, 위호를 추가하여 청묘(淸廟)에 올려서 배향(配享)하는 것은 인정과 예의로 헤아려 볼 때, 진실로 유감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臣)은 예전(禮典)에 실로 밝지 못하오니, 감히 억측의 견해로 논단(論斷)할 수는 없습니다.”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신완(申琓)은 말하기를, “노산 대군(魯山大君)이 선위(禪位)한 뒤의 일은 모두 신료(臣僚)들의 계청(啓請)에 의한 것이고, 신비(愼妃)를 폐위시킨 것은 사실 세 공신(功臣)이 후환(後患)을 염려하여 몸을 보전할 계책이었지 중종의 본뜻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성상(聖上)께서 특별히 배려하셔서 이렇게 널리 자문을 구하시니, 수백 년 동안 한이 맺혔던 인심(人心)이 거의 조금이라도 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건대, 나라의 역대 임금이 계승되고 큰 선비와 훌륭한 보필들이 대대로 인물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일찍이 이에 대해 의논한 적이 없었던 것은 어찌 의논이 감히 거기에 미칠 수가 없었고, 일도 지극히 말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조종조(祖宗朝)에서 시행하지 못했던 예를 아마도 경솔하게 의논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하였다.
우참찬(右參贊) 최규서(崔奎瑞)는 말하기를, “노산 대군의 일은 명나라에서 경황제(景皇帝)를 추복(追復)한 것과 아주 가깝기는 하나, 일은 다 서로 같지 않은 것이 있으며, 신비(愼妃)의 일은 송(宋)나라 원우(元祐) 때에 맹황후(孟皇后)를 복위(復位)시킨 것과 서로 같으나, 선유(先儒)들의 정론(定論)이 이미 있었으니, 오늘의 일에 끌어다가 의논 할 수는 없습니다. 지극히 중대한 일을 억측으로 논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하였다.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은 말하기를, “노산 대군과 신비의 일을 온 나라 사람이 슬퍼함은 세월이 오래 될수록 더욱 깊어지고 있는데, 명나라에서 경황제(景皇帝)를 복위(復位)시킨 것과 우리 나라 중종께서 소릉(昭陵)을 복위시키고, 현종(顯宗)께서 정릉(貞陵)을 복위시킨 일이 간책(簡冊)에 실려 있으므로, 후세에 할말이 있습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근거할 수 있는 전례를 따라 여러 대에 미처 못했던 일을 거행하는 것은 아마도 계지술사(繼志述事)하는 성덕(聖德)에 빛이 날 듯합니다.”하였다.
호조 참판(戶曹參判) 서종태(徐宗泰)는 말하기를, “노산 대군의 위호(位號)를 복위시키지 않음으로 인하여 인심(人心)이 슬픔을 품고 있은 지가 2백여 년이 되었으니, 지금 추복할 것을 의논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대 조정에서 일찍이 한 번도 거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어찌 그 일이 성조(聖祖)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가볍게 의논할 수가 없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신씨(愼氏)의 일은 여러 훈신(勳臣)들이 방자스럽기 이를 데 없어서, 우리 중종[中朝]으로 하여금 배필의 윤기(倫紀)를 보전 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인심(人心)이 원통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 후 1백 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그 일을 논의하여 계청(啓請)한 자가 없었으니, 이는 아마도 선대의 대를 이어받은[繼體] 뒤에는 예(禮)에 거리끼는 바가 있어서 감히 시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두가지 일은 지극히 중대한 것이므로, 진실로 마땅히 십분 시행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하였다.
행 사직(行司直) 박경후(朴慶後)는 말하기를, “노산 대군과 신비의 일은 예부터 유전되어 지금까지도 원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역대 조정에서 명신(名臣)과 숙유(宿儒) 중에 추복(追復)에 뜻을 둔 이가 어찌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실행하지 못한 것은, 어찌 요즈음 세상 사람보다 의견이 미치지 못하여 그러했겠습니까? 이는 아마도 《춘추(春秋)》의 휘친(諱親)하는 도리에 있어서 말하기 어려운 바가 있어 그러한 것 같습니다. 선조(先朝)에서 처분한 일을 감히 갑자기 경솔하게 고칠 수는 없는 것인데, 신과 같은 천견(淺見)으로서는 진실로 논의하기 어렵습니다.”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인환(李寅煥), 행 부제학(行副提學) 조상우(趙相愚), 이조 참의(吏曹參議) 홍수헌(洪受瀗)은 말하기를, “노산 대군과 신비의 일은 부인들과 어린이까지도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있으니, 인심(人心)은 속일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에 와서 이미 폐지된 위호(位號)를 다시 되찾고 이미 쫓아냈던 위(位)를 다시 올려 받들고자 한다면, 지난 역사를 고찰해서 반드시 십분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찾아낸 연후에 그 근거에 의하여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명나라의 경태제(景泰帝) 때의 일과 송(宋)나라의 맹후(孟后)의 일도 같음과 같지 않음이 있습니다. 경제(景帝)는 영종(英宗) 때에 폐위(廢位)되었다가 헌종(憲宗) 때에 복위되었으니, 이는 조카가 숙부를 복위시킨 것으로서 이는 이른바 같다는 것이고, 맹후는 철종(哲宗) 때에 쫓겨났다가 휘종(徽宗) 때에 복위되었는데 상 태후(尙太后)가 이를 주관하였으니, 이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복위시킨 것으로서 이는 이른바 같지 않다는 것인데, 그 밖에 근거할 만한 일이 있습니까? 감히 억측의 견해를 가지고 대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례(典禮)를 널리 고찰하여 큰 일에 흠이 되는 일이 없게 하소서.”하였다.
장령(掌令) 김덕기(金德基), 응교(應敎) 김시걸(金時傑), 지평(持平) 정유점(鄭維漸), 교리(校理) 이희무(李喜茂), 지평(持平) 이언경(李彦經)들은 모두 말하기를, “시행하는 것이 옳기는 하되, 또한 열성조에서 시행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니, 경솔하게 의논하기가 어렵습니다.”하였다.
교리(校理) 이인병(李寅炳)은 말하기를, “노산 대군의 일은 오늘날 감히 의논할 수가 없고 감히 말할 수가 없는 의리가 있으며, 신비(愼妃)의 일을 이제 와서 추론(追論)하는 것 역시 어찌 중대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하였다.
부응교(副應敎) 김진규(金鎭圭)은 말하기를, “노산 대군의 일은 명나라에서 경제(景帝)를 추복(追復)시킨 것이 좋은 예(例)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지금 당장 추복하게 되면, 이는 이미 조묘(祧廟)에 관계되는 것인데 조묘를 영녕전(永寧殿)에 추부(追祔)하는 것은 근거할 만한 예(禮)가 없으니, 이것이 장애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씨(愼氏)에 있어서는 이미 폐위(廢位)된 뒤에 추복하는 것이 아마도 《춘추(春秋)》의 뜻에 어긋날 듯합니다.”하였다.
정언(正言) 김창직(金昌直)은 말하기를, “노산 대군을 추복하는 것은 진실로 폐지할 수 없는 논의입니다. 그러나 신씨를 복위(復位)시키는 문제는 중종께서 윤허(允許)하지 않으신 것이니, 이제 와서 추복할 수는 없습니다.”하였다.
부교리(副校理) 남정중(南正重)은 말하기를, “이 일은 나라 사람들의 다 슬퍼하는 것입니다만,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된 것이므로 감히 쉽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옛 기록을 고찰하여 정확한 증거가 없으면, 갑자기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하였다.
정언(正言) 김상직(金相稷)도 어렵게 여겼고 신씨 문제에 이르러서는, “근거할 만한 예(禮)가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회의에 참석한 백관(百官)이 무릇 4백 91인이었는데, 그 의논에 있어서는 혹은 시행해야 한다고 하고, 혹은 시행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 시행할 수 없다고 한 자도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된 것이므로 감히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다고 하는 데 지나지 아니하였다. 빈청(賓廳)에서 마침내 백관(百官)들 각자가 글로 올린 것을 모두 봉(封)하여 바쳤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이 일은 이미 마음속으로 말없이 계획했던 것이나, 마땅히 수의(收議)한 내용이 다 이르기를 기다려 조처하겠다.”하고, 이어 승정원(承政院)에 하교하기를,
“밖에 있는 대신(大臣)·유신(儒臣)의 수의가 다 이른 다음에 마땅히 빈청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보내겠으니, 그날에 대신(大臣)·육경(六卿)·판윤(判尹)·삼사(三司)를 모두 명초(命招)하라.”하였다. 단종 왕위의 簒位에 부인과 아이들까지도 모두 슬퍼했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