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우(道友) 대선사(大禪師) 혜문(惠文)의 자는 빈빈(彬彬)이요, 속성은 남씨(南氏)로 고성군(固城郡) 사람이다. 어느 해 서울에 올라와 선종(禪宗)인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머리를 깎고는 드디어 이름난 장로(長老)가 되었으니, 나이 30이 넘어서 비로소 공문(空門 승과(僧科))의 선발에 뽑혔고, 여러 번 승려의 계급을 거쳐 대선사에 이르렀다. 지난 임진년엔 화악사(華岳寺)에 머물렀고, 서울에선 보제사(普濟寺)에 우거하면서 법을 전하기도 했는데, 그해 나라에서 오랑캐를 피해 도읍을 옮겼으니, 선사도 이 보제사 역시 오랑캐의 소굴이었기 때문에 황겁하여 어디로 갈 곳이 없는지라, 드디어 문제(門弟)인 선사 모(某)가 거주하는 운문사(雲門寺)에 찾아가 3년을 지낸 뒤 알봉돈장년(閼逢敦牂年)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선사는 그 사람됨의 자질이 강직하였고, 한때 이름난 사대부(士大夫)들도 많이 그와 종유(從遊)하였다. 시 짓는 것을 좋아하여 산인(山人)의 체(體)를 얻었다.
언젠가 보현사(普賢寺)에서 지은 그 시의 대략에,
길이 긴 문 밖에는 사람이 남북으로 다니고 / 路長門外人南北
솔이 늙은 바위 머리에는 달이 고금에 밝아라 / 松老巖頭月古今
하였다. 사람들이 이 시를 많이 읊음으로써 선사의 호(號)가 월송 화상(月松和尙)으로 불리었고, 이로 말미암아 저명한 시인이 되기도 했다. 내가 약관(弱冠) 시절부터 교분을 맺은 처지라, 부음을 듣고 다음의 애사를 지어 슬픔을 표한다.
그 깎은 머리가 중이고 그 입은 옷이 중인데도 마음은 혹 그렇지 않은 이가 있는데, 우리 선사만은 참다운 대사라, 그 옷이 이미 중이었고, 그 뜻 역시 중이었네. 첫째 계행(戒行)에 결함이 없어 마음자리가 청정하였고, 나머지 일로 시를 짓되 붓 잡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그 뜻을 얻음에 이르러선 맑은 운치가 사랑스럽기만 하였네. 쓸쓸한 문도(門徒)가 두서너 사미(沙彌)뿐이라. 누가 그 비석을 세우고 누가 그 시를 편집할꼬. 슬프다. 우리 선사여. 이제는 그만이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