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에 독을 찬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흘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 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체 짐승의 밥이되어 찢기우고 할퀴어라 내 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마금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이 시는 <문장>지(1939.11)에 실린 김영랑의 <독을 차고>이다. 이 작품의 시적 화자가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라고 진술하고 있는 ‘독’의 의미는 매우 상징적이다.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내 산 체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네맡긴 신세임을”에서 구체화되고 있는 간고한 현실 상황에 대면하여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독’을 차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무서운 각오는 결국 죽음이라는 자기희생의 고통을 전제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독을 품고 선선히 가리라/.마금날 내 깨끗한 마음을 건지기 위하야”라고 한 마지막 연에서 깨끗한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임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면서도 지켜야 하는 ‘내 깨끗한 마음’이란 현실을 넘어선 절대적인 가치의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가치를 희구하는 시적 화자의 열망이 ‘독’이라는 상징물에 응집되어 드러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