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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화상

욕(欲)
부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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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풋살구가 꼭 하나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이 시는 서정주의 <화사집>에 실린 시, <자화상>의 전문이다. 이 시 전체를 관류하는 중심 사상은 운명의식이다. 인간이 숙명성에 직면하였을 때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다. 운명에 저항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순응하든지 하는 방식인 것이다.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고 운명에 당당하게 맞서고 있는 시인의 시에는 언제나 “몇방울의 피”가 섞여 있었다. 프로이트에 있어서 인간에 내재한 ‘죽음의 본능(타나토스)’는 ‘파괴본능’ 및 ‘공격본능’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의식이 부여되는 순간부터 숱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인간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희구하는데, 이는 자궁에의 회귀로 나타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의식적인 삶 그 이전의 생명상태, 즉 죽음에 대한 열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인간 모두가 자살로 치닫지 않는 것은 타나토스의 외재화로 인해 자신에 대한 살기가 타자에 대한 파괴나 공격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화사집>의 시들에 나타난 운명에의 항거는 원죄를 지닌 인간이라는 불가항력적 운명에 대한 항거로서 공격과 파괴의 이미지인 ‘피’로 상징되고 있는데, 이는 곧 ‘죽음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손광은 외, [우리 시대의 시인 연구], 시와사람, 2001, 213~2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