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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학적 헌신으로서의 사랑

애(愛)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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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이 깜깜하다. 나는 잠에서 깼지만 일어나 앉지는 않는다. 당신이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나도 잠에서 깨었다. 방 안에는 창 밖의 가로등에 비친 당신의 형체만 있다. 나는 모른 척, 이마에 팔을 얹고 당신을 본다. 당신은 무엇인가 망설이는 듯하다. 당신은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않고 나를 내려다본다. 내가 수족관 안의 광어를 보듯, 당신은 나를 보고 있다. 당신은 소리나지 않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광어가 죽기 전에 내뱉는 가냘픈 바람 소리가 당신을 따라 나간다. 당신은 당신의 오백만원이 들어 있는 통장만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나를 깨우지 않고 말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어머니가 나를 버리던 날이 기억나는 것 같다. 처음 왔었던 춘천이 기억나는 것 같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당신이 빠져나간 문만 바라본다. 얼굴 없는 어머니가 불쑥 들어올 것 같다. 나는 일어나 불을 켜고 시계를 본다. 서울로 가는 막차가 있을지 궁금하다. 나는 휴지통에 처박힌 광어를 본다. 언제 죽었는지 들키지 않았던 광어를 본다. 벌써 당신이 보고 싶어진다.
나는 광어를 꺼내어 우물우물 씹기 시작한다. 
횟집 종업원인 나는 룸살롱의 여급을 사랑한다. 누구의 자식인지 모를 아이를 임신한 그녀를 술집에서 빼내어 그녀와 떠나기 위해, 나는 아버지일지도 모를 사람을 협박하여 돈을 구한다. 아이를 지운 그녀의 회복을 위해 정성들여 죽과 광어회를 준비한다.
그러나 함께 떠나기로 했던 그녀는 내가 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몰래 통장만 들고 나간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버리던 날이 기억나는 것” 같고 “처음 왔었던 춘천이 기억나는 것” 같다고 느낀다. 혼자 남겨진 나는 그녀를 위해 준비했지만 손도 대지 않고 휴지통에 버려버린 광어를 꺼내어 씹기 시작한다. 
백가흠, [광어], {귀뚜라미가 온다}, 문학동네, 2009. 
김형중, [남자가 사랑에 빠졌을 때](해설), 백가흠, {귀뚜라미가 온다}, 문학동네, 2009.
손정수, [사랑이 타락해가는 일반적 경향에 대한 사례보고서; 백가흠, {귀뚜라미가 온다}(문학동네, 2005.)](서평), {실천문학}79집, 실천문학사, 2005.
지그문트 프로이트,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김정일 역,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열린책들,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