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DB에서 검색하고자 하는 내용을 입력하고 를 클릭하십시요.


   “누구먼 어쩌가디!”

애(愛)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내용보기

아래는 소설가 해정이 잠시 진평리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을 때 겪은 에피소드이다. (…) 마을 노인들이 자박자박 와서는 비닐이나 신문지에 싼 먹을거리들을 슬쩍 놓고 가곤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놀라서 튀어나가, 왜 이런 걸 저한테 주시느냐고 괜히 모르는 사람한테 잘못 놓고 가시는 거라고, 설명을 하고 해명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랬더니, “누구먼 어쩌가디.” 방 안에 들어와 ‘누구먼 어쩌가디’를 뇌다가, 양에 안 차서 볼펜을 꾹꾹 눌러 써보기도 하다가, 그만 쿡쿡 웃고 말았다. 그 뒤로는 굳이 튀어나가지도 않고 가져다주는 대로 감사히 받아먹는 중이었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왜 음식을 가져다 주냐며 타박하는 해정에게 마을 노인으로부터 돌아온 답은 간명하다 못해 퉁명스럽다. “누구먼 어쩌가디.” 이 한마디다. 물론 이 말은 누구인들 상관있겠냐는 뜻일 테지만, 그 한마디에 이미 타자(이방인)에 대한 무사심한(조건 없는) 환대의 윤리가 응축돼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처음 영희가 할머니들과 같이 싸우면서 그녀들에게 느꼈던 답답함의 정체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저도 첨엔 그랬어요. 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만날 악만 쓰고, 점심을 날마다 사먹을 수도 없고 노인들이 도시락 챙기기도 그래서 군민의 쉼터에서 해먹었는데 무슨 피크닉하는 줄 알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맛있겠다며 밥 좀 달라고 오죠. 그러면 특히 할머니들이 어서 오시라고 하고 밥을 퍼주죠. 그런데 노인들이 왜 군청 앞에서 밥을 해먹고 있는지 묻지도 않고 밥만 먹고 가버려요. 나는 첨에 그것도 그렇게 화가 났어요. 근데, 이젠 제가 그래요. 지나가는 사람이 와서 맛있다고, 잘 먹고 간다고 하면 그렇게 고맙고 좋은 수가 없어요. 내가 뭐라고 해도 할머니들이 그냥 웃기만 하는 것이 첨엔 답답했죠. 근데 자꾸 반복되다보니까, 제가 그분들을 닮아가요. 근데, 그분들처럼 하니까 맘이 참 좋더라고요. 그냥 좋아요.”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사연에는 도무지 관심조차 두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허물없이 밥을 먹여대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고 영희는 처음에 답답함을 느낀다. 그러다가 차츰 그것에 익숙해지면서 그녀 역시 할머니들과 똑같이 행동하면서 기뻐하게 된다. 물론 그녀들에게 타자란 나 이외의 다른 사람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하찮아 보이는 미물에서부터 심지어 사물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것을 아우른다. 용수막댁 김공님은 뒤꿈치에서 뭔가 터지는 느낌에 그만 움찔, 몸이 굳고 말았다. 틀림없이 그것은 좀 전에 자신이 빗자루로 잘 걷어낸다고 걷어냈던 거미일 것이었다. 분명히 걷어냈던 거미가 언제 다시 방으로 기어들어왔는지는 하늘에 맹세코 정말 모를 일이었다. 죽이려고 맘먹은 게 아니었다는 것을 그러나 누구에게 증명해 보일 것인가. 가슴이 후들후들 떨려와서 공님은 우선 첫새벽에 길어온 우물물은 아니지만 안방 옆 입식 부엌으로 부리나케 가서 수돗물을 한 대접 받아서는 뒤안 장광(장독대)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가장 큰 독에 물을 올려놓고 일단 철융신이든 조왕신이든 성주신이든 아무나 붙잡고 용서받고 이해받고 싶은 마음에 손부터 비볐다. 아침 해가 떠오르려면 한참 먼 어스름 새벽이었다. 손에 땀이 나도록 비비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좀 가벼워져 방으로 들어와 이르다 싶기는 해도 전화를 들었다. 위의 인용문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잘 드러난 대목이다. 이 경외감으로부터 “세상만물은 다 그렇다. 사람과 똑같이 아프고 똑같이 울고 똑같이 웃는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세상의 만물을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의인법과 같은 게 아니다. 그것은 관계성의 진리에 가닿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관계성이란 “내가 의식하든 말든, 인정하든 말든 항상-이미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아울러 “나의 생존에 나를 살아 있게 해주는 그 모든 이웃들이, 그 모든 외부가 들어와 앉아있는 것이고, 그 모든 이웃들의 연관이 표현”(이진경, 「코뮌주의 : 코뮌주의적 존재론과 존재론적 코뮌주의」)돼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세상의 약한 존재들에 대한 염려의 마음이 솟아난다. “앗따, 저놈의 다글다글 우르릉 쿵쿵거리는 소리가 나는 꼭 아무 죄없는 우리 아그들 뚜러러패는 소리 같당게. 아이구메, 우리 새끼들 다 죽겄네 싶어서 내가 그냥 맘이 조마조마혀.” 당신의 자녀들 또한 이미 노인이 됐을 아흔 노인 오명순으로부터 이 말을 들었을 때, 소설가 해정은 그녀가 뜻하는 ‘우리 아그들’이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지 의아해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결국 그것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 특히 세상의 모든 어린 것, 여린 것,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와 같은 여리고 약한 존재들에 대한 염려, 이를 다른 말로 ‘짠함’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짠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안타깝게 뉘우쳐서 마음이 조금 언짢고 아프다.’이다. 그러나 특히 이 지역 호남에서 짠하다는 말은 “사전적인 뜻과는 상관없이 매우 복합적인 감정이다. 꼭 집어서 뭐라고 단정하기가 애매하다. 물론 동정심이나 연민과도 그 결이 다르다. 우선 그것은 타인을 위해 뭔가를 하도록 호소한다는 점에서 윤리적 명령과 같은 것”(정명중, 「장터에서 호남의 감성을 묻다」)이다.  
 
정명중, <저항, 사랑, 공동체>,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90-93쪽.  
한순미 외저,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감성총서 제9권] 우리시대의 사랑, 90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