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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답함의 힘

애(愛)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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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할머니들의 답답함이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차갑고 건조한 권력의 형식(질문)을 보기 좋게 희화화해버렸을 때이다. 곧 돌공장 순양석재가 주민들을 업무방해죄로 고발한 탓에 경찰서에서 그녀들이 인정신문을 받아야만 했는데, 이때 이들이 쏟아낸 말들의 향연은 그야말로 이 소설에서 단연 압권이라 해도 좋다. “땅 파묵고 살제. 나 같은 고무차대기가 뭔 재주가 있겄소이? 이날 평상토록 땅 파서 씨뿌리고 거둬서 나도 묵고 새끼들도 멕이고 입히고 갈쳐서 이우고, 그러고 살았제에. 아 그런디 청천벽력맹키로 독공장이 들어와갖고는 이르케도 사람을 못살게 허냔 말이요오. 천불이 나서 못살겄기에, 공장 앞이서 악을 좀 썼다고 우리를 경찰서에 고소를 하는 것들이 사람이여, 짐승이여어. 아무리 사램이 돈이 허천병이 났다고 해도 그면 못써어. 돈을 벌어묵고 살래도 착허게 벌어묵어야제, 넘한테도 싫은 소리 안 듣고 내 뱃속도 핀헐 것인디이….” 우선 판소리의 사설이나 타령조를 방불케 하는 말의 가락과 흘러넘침(과잉)이 권력의 형식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 놓는다. 위의 인용문은 신문을 담당한 형사(김경사)가 ‘직업이 무엇이냐’는 지극히 요식적인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 ‘오명순’ 할머니가 장황한 요설체로 응수하는 대목이다. 이어 이 같은 요설체로부터 의도되지 않은 퍽 장난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고 만다. “임애기 본적이 어디입닝까?” “소리쟁이.” 김경사가 웃고 만다. “웃지 마러, 정든게.” 그래서 모두 웃고 말았다. (…) 이제 영희 차례가 되었다. “성함을 확인하겠습니다.” “이영희입니다.” “본적지는요?” “배고픈다리요.” 오명순의 시앙골, 임애기의 소리쟁이가 오래 잊고 있던 배고픈다리를 떠올리게 하다니. “위원장님까지 왜 그러십닝까아.” 김경사가 웃는다. 영희도 웃는다. 위 인용문은 권력의 형식이 작동되는, 그래서 엄숙하고 권위적이어야 할 신문의 공간이 소극笑劇의 무대로 돌변해버리고 있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소극은 이내 다음과 같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대답은 회피하고 자꾸 창밖만 쳐다보시깁닝까, 위원장님?” “김경사님, 꽃 좀 봐요.” “위원장님이 수사 협조하는 데 모범을 보이시야지, 해찰이나 하고 말입니다. 자아, 여기 순양석재 측에서 업무방해 증거로 내놓은 사진을 보면, 트럭 앞을 가로막는 노분례씨 뒤에서 뛰쳐나오고 있는 분이 위원장님 본인 맞으시죠이?” 열어놓은 창문으로 바람 한줄기가 불어왔다. 그 틈을 타고 꽃들이 책상 위로 날아들었다. 할머니들이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야, 이놈들아아, 꽃나비다아! 꽃나비여.” 야, 이놈들아, 라고 한 게 재밌었는지, 노인들은 어린 소녀들처럼 서로의 옆구리를 찌르며 까르르 웃어젖혔다. 김경사가 파르르 떨며 창문을 꽝 닫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쁜 꽃나비가 무섭기도 허는 모냥이여어!” 왕언니 오명순의 한마디에 겨우 멎었던 웃음소리가 또다시 꽃처럼 피었다. 연극 ‘꽃 같은 시절’의 한 장면 “야, 이놈들아, 꽃나비다!” 한마디에 모든 상황이 뒤바뀌어버린다. 권력의 형식은 유쾌하게 조롱당하는 대신 카니발의 활력을 연상시키는 왁자지껄함[亂場]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로써 그녀들의 힘의 전략인 답답함이 아둔하고 수세적인 것만이 아님이 판명된다. 이를테면 그것은 주어진(혹은 강요된) 판을 뒤엎어버리는 전복적인 것으로 변환되는 힘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녀들의 힘(답답함)을 단지 유머나 해학쯤으로 이해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영희는 그녀들의 왁자 지껄한 웃음 속에서 “물 흐르는 소리”를 들었고. 그 탓에 울음을 터뜨릴 뻔 한다. 그녀들의 웃음은 온전히 웃음으로만 이뤄진 게 아니다. 그것은 울음과 뒤섞인 웃음이고, 그 경계도 모호하다. 게다가 그녀들의 울음은 ‘소리 없는 것들의 온갖 소리’라는 역설을 껴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적막한 속에서 소리 없는 것들의 온갖 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없다고 해서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닌 것들의 소리다. 그래서 가슴 한쪽이 먹먹해왔다. 꼭 우리들 같아서. 우리도 소리를 안 내고 살뿐이지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닌데도 세상은 땅 파먹고 사는 아낙들의 소리가 아예 없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무슨 소리라도 낼라치면 무식한 아낙네가 뭣을 아느냐는 투였다. 그래도 우리는 울지 않았다. 우리 울음 알아주는 데도 아닌 데서 울면 우리만 서러워지니 울지 않았다. 어쩌다 울 때도 놀 때나 울지, 일할 때는 힘들어 울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울면, 닝꽁닝꽁닝꽁, 지꾸지꾸지지잉, 띠룽띠룽띠루룽, 하는 것들이 우리 울음에 묻힐까봐 울지 않았다. 세상은 그녀들을 소리 없는 존재로 취급한다. 그녀들 역시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있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 탓에 그녀들은 자신들의 울음(소리)을 들어주지 않은 데서는 결코 울지 않는다. 오직 놀 때나 돼서야 운다. 특히 위의 인용문에서 ‘닝꽁닝꽁닝꽁’하고 우는 것은 다름 아닌 지렁이다. 적막 속에서 숨죽여 들어야만 겨우 들린다는 이 지렁이들의 울음이 묻힐까 걱정돼 제대로 울지도 못한다고 말하는 그녀들의 하소연은 몹시 애처롭다. 그러나 그런 만큼 숭고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녀들의 울음에는 이미 타자들에 대한 염려와 배려라는 윤리적 지향성 같은 게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정명중, <저항, 사랑, 공동체>,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87-90쪽.  
한순미 외저,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감성총서 제9권] 우리시대의 사랑, 87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