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DB에서 검색하고자 하는 내용을 입력하고 를 클릭하십시요.


   이길 수 없는 게임?

애(愛)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내용보기

이렇듯 겨우 존재하는 세계에 의지해 살아가는 그녀들이 자본-권력에 대항한다는 것은 이미 실패가 예정된 싸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싸운다. 이게 사태의 본질이다. 냉소와 체념을 끼고 살아가는 무력한 자들에게 이 싸움은 무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대책위원장인 영희와 남편 철수가 갈리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철수가 보기에 영희가 가담하고 있는 싸움은 이미 이길 수 없는 게임이다. 반면 그녀에게 이 싸움은 결과와 상관없는 싸움이다. 관건은 승패가 아니다. 아래는 영희가 어린 아들 복주에게 한 말이다. “엄마도 싸우는 게 힘들어. 하지만,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나는 건 우리를 더 힘들게 할 거야. 복주야, 엄마는 순양석재하고 싸우는 게 아니고 그 뭐야, 어, 그니까, 그래 맞아, 내 속의 패배주의하고 싸우는 거야. 긍게, 내 속의 패배주의와 싸운다는 것이 무엇을 뜻 하냐 하며는, 이기든 지든 결과에 상관없이 나를 억압하는 것과 싸운다는 것이여. 말하자면 긍게,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서 산다는 것이여. 주체적으로 산다는 거라고 알겠지?” 내 속의 패배주의니 삶의 주인이니 운운하면서 이기고 지는 것과 상관없이 싸워야 함을, 그 말뜻을 헤아리기 아직은 이른 아들에게 설명하는 그녀의 말은 적잖이 어눌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은 저항의 실존적(인간학적) 본질에 육박하는 울림이 있다. 저항은 존엄에 대한 배려로부터 촉발된다고 주장한 다니엘 벤사이드는 저항하기의 본질을 다음처럼 정의한 바 있다. (…) 저항하기, 이는 단적으로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양도하지 않기이다. 상황이 위태롭더라도, 입장이 나쁘더라도, 취약하고 무력한(아마도 일시적일) 위치에 내몰린다 하더라도 말이다. 저항한다는 건 자신의 취약함과 불리한 역관계를 인정한다는 걸 함축한다. 그러나 이는 그런 역관계에 동의하지 않는 한에서, 자신의 취약함에 동의하지 않고 그걸 받아들이지 않는 한에서, 그것에 찬동하지 않고 그것을 감내하지 않는 한에서이다. 우리는 항상 패배할 수 있다. 얼마나 적절한 것이었든 간에 여전히 경탄할 만한 수많은 저항들이 패배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중요한 건 패배를 자인하지 않기, 승리자들에게 승리를 인정해주지 않기, 패배를 운명의 신탁이나 치욕스러운 항복으로 변질시키지 않기, 물리적 실패가 도덕적 패주로 변질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이다.(다니엘 벤사이드, 김은주 옮김, <<저항>>)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고 미리 단정해버리는 것과 항상 패배할 수 있다는 경험적(혹은 반복적) 사실을 수긍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앞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취약함과 불리한 역관계를, 그것도 충분히 인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인정(굴욕)으로부터 저항은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오직 뒤의 입장에 섰을 때만이 적의 물리력 앞에서 움츠려들지 않고 게다가 자신의 취약함에 대한 굴종적인 자인 없이, ‘영희’처럼 자신을 억압하는 것과 싸운다는 식의 저항의지가 촉발된다. 이 의지는 물리적 실패에 의해서 꺾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도덕적 패주로 변질되지 않게 하려는 완강함 혹은 고집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그것이 영희가 “결코 절망의 빛을 보이지” 않고, 늘 “새로운 대상에 희망을 걸어보는” 우직함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명중, <저항, 사랑, 공동체>,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83-85쪽.  
한순미 외저,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감성총서 제9권] 우리시대의 사랑, 83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