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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폐 혹은 원한의 형식

애(愛)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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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 무기력, 체념, 방관 속에서 세계의 지배적인 가치는 더욱 선명하고 강렬한 것으로 도드라져 보일 수밖에 없다. 자본-권력의 커넥션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가장 확실한 가치는 물론 돈(화폐)이다. 이 물신에 의해 세계는 교환가치 또는 등가성(대칭성)이라는 원한resentment의 형식에 따라 무차별적으로 양화된다. 이를테면 일정한 질을 내포하고 있을 삶의 터전은 집값이나 땅값과 같은 화폐의 형식(양적 가치)으로 반드시 대표/재현되어야만 한다. 유달리 꽃을 좋아하는 김공님 할머니의 막내딸이 “어차피 우리 집값이 얼마나 하겠어. 나 같으면 공장 들어와, 도로 놔져, 발전하면 땅값 올라가, 그러면 집 팔아서 그 돈으로 편안히 살겠네.”라고 했을 때, 그녀가 느낀 당혹감은 바로 그러한 원한의 형식에 대한 일종의 반발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저희들이 물장구치고 놀던 냇물이 돌가루로 썩어버려도 상관없다는 것일까. 택배로 보내주면 역시 엄마가 만들어준 간장 된장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 한 그 간장 된장 만드는 콩밭이 돌가루로 망가져도 괜찮다는 것일까. 그래서 냇물이 썩고 콩밭이 망가져도 막내딸 말대로 땅값이 올라가기만 하면 좋다는 것일까. 공님은 암만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만약 그녀가 느끼는 당혹감을 두고 생태주의 같은 것을 떠올린다면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그것은 도시적 삶에 염증을 느낀 도시인이 고안(발명)해낼 전형적인 풍경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의 당혹감은 그녀가 살아온 삶의 터전이 지니고 있을 고유한 질성이 혹은 단독성이 증발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조바심 탓에 생긴 것이다. 따라서 저마다의 삶의 공간이 지닌 단독성을 아무렇지 않게 소거하고, 그것을 양적 가치로 환원하는 데 이골이 난, 이른바 원한의 인간들에게 소설의 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장면은 일종의 불가사의지 싶다. 즉 교환 가치 체계에 포섭돼 있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대화는 뚱딴지같은 것이다. 매콤한 쓰레기 연기가 저녁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며 부부는 바짝 긴장했다. 철수가 전화를 건네받았다. “저, 사실은 내가 가서 살 집이기는 헌데… 허어 참, 어떡해야 좋으까이. 꼭 우리 집에서 살고 싶어요?” 전화로 듣기에도 목소리가 선해서 우선 마음이 놓인다. “예, 꽃은 예쁜데 집이 외로워 보인다고, 집사람이 자꾸….” 말을 해놓고 보니 아차, 실없는 소리를 했구나 하고 마음이 졸여졌다. “꽃이라고요? 우리집에 꽃이 있었던가앙? 하여간, 언제까지 살으실지는 몰라도 꽃이 이뿌다며는, 살으야지요 뭐.” 갑자기 눈물이 나올 뻔했다. 무슨 세상에 이런 집주인이 있나. “집세는….” “세는 무슨. 그쪽에서 세를 받으시야지.” “저희가요?” “집 지켜주잖에요.” 그렇게 해서 철수와 영희는 그들의 소망대로 이곳 진평리에 돈 안 주고도 살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하게 되었다. 꽃이 예뻐 빈 집에 세 들어 살고 싶다고 말하는 세입자나 꽃이 예쁘면 무상으로 살라고 말하는 주인 모두 결코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적 소유 관념에 충실한 일상적인 화폐 공간에서는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사건이기 때문이다. 교환 가치의 체계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위와 같은 장면(사건)이 소설의 초반부에 등장한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우선 그것은 교환 가치 체계 밖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어떤 페이소스를 자극하는데, 바로 압도적인 힘에 의해 언제든 스러질 운명에 처한 겨우 존재하는 세계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정명중, <저항, 사랑, 공동체>,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81-83쪽.  
한순미 외저,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감성총서 제9권] 우리시대의 사랑, 81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