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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소의 기원

애(愛)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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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시절>>의 서사는 세계의 이원성 혹은 양극성에 의지해 펼쳐진다. 한편에 너무도 지배적이고 압도적이어서 결코 넘어뜨릴 수 없을 것 같은 자본-권력의 세계가 있다. 주민들의 의사에 반하는 불법을 떳떳하게 자행하는 쇄석공장 순양석재로 대변되는 이 세계는 철저하게 화폐 중심의 교환가치 체계로 작동한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소리 없는 울음을 우는 미미한 존재들이 거주하는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겨우 존재하는 세계, 그야말로 교환가치 체계에 의해 조만간 소멸해버릴 위기에 놓여 있는 매우 취약한 세계이다. 겨우 존재하는 세계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자본-권력의 커넥션은 불가항력이다. 게다가 이 커넥션은 공익의 관점에서 명백히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불법이 아닌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마법(=속임수)에 능하다. 이 마법은 늘 힘없는 자들이나 가난한 자들에게 무기력과 체념을 불러일으킨다. 그 마법의 면모는 이를테면 이렇다. 우선 군청에 대한 순양석재의 소송 대부분이 수개월 간격으로 소가 취하된다. 소송을 남발하고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 순양석재는 판결이 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법 영업을 지속하고, 막대한 이득을 남긴다. 즉 군청에서는 불법공장에 대한 형식적 고발과 한 달이면 수억을 버는 업체에 몇 백 만원 벌금이라는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주민들은 “돌공장에서 나오는 먼지와 소음으로 집이 집이 아니고 동네가 동네가 아니며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닌 생활을 이어가야”한다. 돌공장 탓에 삶의 터전이 절단 나는 판국에, 그런 사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취하하기 위해 소송을 걸고, 업체가 소송을 걸어주어 관청에 변명거리가 마련되는 식의 은밀한 거래가 자본-권력 커넥션 사이에서 자행되고 있는 셈이다. 비리의 묵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더군다나 부정한 힘들의 공모를 규탄하기 위해 일어선 약자들에게 공권력은 가치중립성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쓴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하기조차 한다. “위원장님, 이것은 알으셔야 합니다. 저희들에게는 인근 마을 주민들도 순양석재도 똑같은 민원인이라는 겁니다. 저희는 다만 중간자적 입장에서 어느 한 곳이라도 불상사가 일어나면 안 되겠기에, 경찰공무원의 당연한 직무의 일환으로 근무를 나갔던 것뿐이고요.” 이 희한한 가치중립성(=중간자적 입장)이 실은 공익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공익이라는 명분 아래 불법을 저지른 자나 불법을 규탄하는 자 모두 동일한 민원인으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결국 불법과 합법이 공익이라는 평면 위에 교묘히 등치됨으로써, 법에의 호소는 무력한 것이 되고 만다. 약자들이 법에 호소는 하는 것은 조롱거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 그러한 사실을 더 명확하게 각인 시킨 사건이 바로 대책위원장 이영희가 감사원에 군청에 대한 감사를 청구한 일이다. 그녀는 “불법적인 쇄석기 설치, 등록 전 위법 가동, 허구적인 환경오염 저감방안 및 부실한 사업계획서를 묵인하고 순양석재에 업종변경(추가) 승인을 내준” 순양군청을 감사해달라는 취지의 청구서를 감사원에 접수하려 한다. 이때 접수창구 직원은 대뜸 “감사 청구 접수는 아무나 하는 줄 알아요?”라고 힐난한다. 이에 질세라 ‘영희’는 자신 역시 “엄연한 국민이고, 국민이면 감사 청구할 자격이” 있다고 응수한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감사 청구를 접수한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접수창구 직원이 했던 말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 곧 접수는 아무나 하냐는 말은 결국 “접수를 해도 힘없는 사람의 접수는 아무 소용없다는 말”임을 깨닫는 것이다. 물론 한 국가의 국민이라면 감사를 청구할 자격이 있다는 말은 틀린 게 아니다. 명목상 옳다. 그러나 그때의 국민은 힘 있는 사람이라는 단서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이를테면 당위로서의 국민과 실질로서의 그것이 서로 다른 셈이다. 따라서 힘없는 자가 국민의 자격을 운운하는 것은 그저 조롱거리일 따름이다. 이러한 유의 조롱에 이미 익숙해진 이들이라면 조롱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종의 감정적 방어기제 같은 것을 작동시킬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냉소다. 냉소란 기본적으로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같은 일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낄 때”(에바 일루즈, 김정아 옮김, <<감정자본주의>>) 생기는 감정이다. 즉 어떤 것이 나쁘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강박적인 표현양태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좋은 게 좋은 거다.”와 같은 말은 냉소의 대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소설을 쓰기 위해 마을에 잠시 들어온 해정이 분노하면서 노인들의 외로운 투쟁 소식을 남편인 석현에게 전했을 때, 그가 보였던 반응 역시 전형적인 냉소이다. “새삼스럽게 뭘 분노씩이나, 대한민국이라서가 아니라, 세상이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약자 앞에서 강하고, 강자 앞에서 약하고….” 석현의 반응에서 보듯, ‘세상이 원래 그런 거’라는 식의 이른바 세계에 대한 체념적 이해 앞에서 분노란 쓸모없는 것, 곧 감정의 잉여일 뿐이다. 체념이란 그것이 부정적이건 혹은 긍정적이건 상관없이 세계에서 통용되는 지배적 가치를 주체가 굴욕적으로 승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를 마치 능동적인 초월(혹은 초연함이나 달관)의 경지로 착각해버린다는 점이다.  
 
정명중, <저항, 사랑, 공동체>,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76-79쪽.  
한순미 외저,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감성총서 제9권] 우리시대의 사랑, 76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