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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와 약속, 그리고 공감의 정치

애(愛)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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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의 연대라는 사상은 세계를 잿더미로 만든 양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미증유의 비극을 경험한 유럽 사회에서 새로운 인간의 정치를 모색했던 아렌트가 주저 <<인간의 조건>>에서 제시한 용서와 약속이라는 두 가지 원리를 상기시킨다. 아렌트의 정의를 따른다면, 용서란 자신이 무엇을 행했는가를 알지 못하고, 알 수 있다 할지라도 행한 것을 되돌릴 수 없는 무능력인 환원불가능성의 곤경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예기치 않은 행위, 반동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 모두를 그 행위의 결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행위이다. 하지만 용서는 아마도 종교적 맥락에서 또 사랑과의 연관성 속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공론 영역에는 비실재적이며 허용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될 우려가 있다. 그 한계를 감안하면서 제시한 또 하나의 원리가 약속이다. 아렌트는 그녀의 저작에 깔려 있는 짙은 어둠에 한 줄기 빛을 비추듯이 아름다운 메타포로 약속을 정의한다. 약속을 지키는 능력은 미래라는 불확실성의 바다에 안전한 섬을 세우게 한다. 이 섬이 없다면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지속성은 물론이고 연속성조차 갖지 못한다. …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외로운 마음의 의심과 모순에 사로잡혀, 그 마음의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고 방황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을 것이다. 이 어둠을 걷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공론 영역을 덮고 있는 빛이다. 이 빛은 약속을 하고 지키는 사람의 동일성을 보장해주는 타인의 현존을 통해서 빛난다(한나 아렌트, 이정우 옮김, <<인간의 조건>>). 믿음과 배신, 파괴와 살육으로 점철된 19세기 말-20세기 전반의 역사적 경험, 그리고 일본의 패망과 뒤이은 냉전 체제로 인해 강제로 봉합되어야 했던 기억의 봉인이 풀린 90년대 이후 동아시아에서 ‘용서’와 ‘약속’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탁상공론처럼 보이기도 한다. 책임과 사죄는 현실정치에서 계속 오염되어갔고, 이를 선언이라도 하듯 망언은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일어났던 일은 일어났던 일이다.”, “과거지사는 과거지사일 뿐이다.”라는 식의 논리를 철저히 거부하는 원한의 윤리학을 정초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이자 작가인 장 아메리의 처절한 복수의 사상에 훨씬 공감이 가는 것은 이러한 현실정치의 악순환 때문이다. 하지만 원한은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원한을 풀어내지 못한 채, 옛 강제수용소의 은어로 사용되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스스로 자신을 “끝장 내버린”(자살한) 아메리의 운명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이지러지게 한다. 일본 사회에서 원한의 정치라는 문제 설정은 근대 이래로 항상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억압된 민중의 원한이라는 감정을 스스로 재사유하는 것을 통해 근대 일본제국이 수행한 전쟁이 낳은 식민지, 그리고 전장의 무수한 원한들을 이해하고, 이러한 원한을 풀고자 하는 사람들의 활동에 공감하고 또 연대하는 방향의 모색을 의미한다. 그리고 원한을 푼다는 주체적인 행위에서 일본 사회의 ‘원한怨み’의 감정은 한국의 ‘한恨’의 감정, 나아가 ‘한풀이’와 공명할 수 있는 가능성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화가 아닌 난사,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어간 사람들을 보면서 죽은 자들의 고통,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야말로 정념의 공동체이자 ‘감정기관emotive institution’으로서의 국민국가를 넘어선 공동체를 모색하는 사유/행위의 출발점인 것이다.  
 
이영진, <애국과 동아시아>,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311-313.  
한순미 외저,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감성총서 제9권] 우리시대의 사랑, 313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