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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국과 개죽음

애(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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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전쟁이 낳은 전례 없는 무수한 죽음에 대해 일본 사회는 어떻게 의미부여를 해왔을까. 여기서는 그 무수한 죽음들 중에서도 ‘특공’의 죽음에 초점을 맞춰 일본 사회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의미부여의 방식에 대해 이해해보고자 한다. 우리에게는 ‘가미카제’神風로 더 잘 알려진 특공의 사례가 흥미로운 이유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중국이나 남양군도 등의 전장에 출전한 병사들과는 달리 침략전쟁의 혐의에서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가고시마에서 본격적인 특공작전이 전개된 시기는 이오지마 전투의 패배 이후 남양 군도에서 후퇴한 일본이 소위 본토방위전쟁을 준비하던 1945년 2월 이후이다-, 전후 일본 사회에서 전사자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두 축인 순국과 개죽음의 길항 관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패전과 뒤이은 전후 민주주의 교육 등에 의해 전쟁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지난 전쟁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점을(나아가 침략전쟁이라는 점을) 논리적으로는 받아들이면서도, 그 전쟁에 동원되어 죽은 자국의 병사들을 침략자로, 혹은 그들의 죽음을 개죽음이라고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간극과 길항에 대한 담론들이 특공대원의 죽음에서 더욱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특공대원의 죽음을 순국으로 보는 시각은 말 그대로 그들의 죽음이 천황을 위한, 그리고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한 헌신적인 죽음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전시기의 가장 강력한 언설이면서 동시에 전사자들에 대한 전후 위령의 공식 수사인 평화의 초석론과도 연결되는 가장 공식적인 입장이다. 하지만 순국이 반드시 이러한 고정적 의미를 갖는 것만은 아니다. 순국과 충절에 대한 강조는 전전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과 이로 인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충절과 순사를, 1945년 8월 15일의 종전선언(엄밀하게 말하면 항복 선언)과 뒤이은 ‘인간선언’(1946)에 의해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천황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이어질 위험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1960년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起夫는 「영령의 소리」(1966)라는 작품을 통해 죽은 특공대원(=귀신)의 목소리를 빌려 현재의 천황제(소위 상징천황제)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일본이 졌다는 것 / 농지개혁 / 사회주의적 개혁 / 우리 조국의 패배 / 패전의 짐을 모두 지는 것, 다 좋다 / 우리 국민은 그 짐을 잘 짊어졌고 / 시련을 견디고 나서도 아직 힘이 있다. / 굴욕을 견디는 것 / 반항할 수 없는 요구를 깨끗하게 받아들이는 것, 다 좋다. / 하지만 단 하나, 단 하나 / 어떠한 강제, 어떠한 탄압 / 어떠한 죽음의 협박이 있다 하더라도 / 천황폐하는 인간이라고 선언하면 안 된다. … 그것을 허구라고, 그것을 거짓이라고 꿈에도 말하지 못할 것 / (만약 사람의 마음속이 깊어서,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 어찌하여 천황폐하는 인간이 되었사옵니까. 어찌하여 천황폐하는 인간이 되었사옵니까. 어찌하여 천황폐하는 인간이 되었사옵니까. … 당시 아라히토가미現人神였던 천황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쳤음에도,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천황이 ‘인간선언’을 함으로써 그 죽음이 소위 개죽음이 되어버린 자신들의 배신감과 절망감을 영매의 입을 빌어 “어찌 천황폐하는 인간이 되었사옵니까”라며 비장하게 토로하는 망령들의 목소리는 전후의 경제 부흥 속에서 일상의 쾌락에 탐닉하는 산 자들의 공동체에 결코 봉합될 수 없는 사자들의 원한에 넘치는 절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죽은 자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죽음을 순국이라고 부르는 산 자들의 공동체 자체가 거짓과 위선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순국이 갖는 이러한 양면성에도 불구하고, 이 입장이 지난 전쟁을 수행한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 나아가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논리로 전화될 수 있을지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충절에 대한 강조는 젊은 영령들의 죽음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 천황의 항복 선언을 강하게 비판할 수 있는 측면이 있지만, 이 논리가 국가의 전쟁책임, 즉 가해책임에 대한 인식과 연결되지 않을 때, 그것은 보수적 논리에 흡수되어 버릴 위험이 더 크기 때문이다. 한편 개죽음론은 그들의 죽음이 무의미한 희생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지만, 이 역시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다원성을 내포하고 있다. 사회학자 아오키 히데오靑木秀男는 특공대원의 ‘필사’(必死)를 구조적으로 접근하면서, 개죽음론의 다의성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 바 있다. 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1)특공은 전황의 전환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은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입장(여기서는 특공작전의 무모성이 비판된다), 2)죽음의 공포마저 억압당한 채 인간 병기가 된 특공대원의 자기 소외를 강조하는 입장, 3)특공대원의 죽음은 역사적으로 무의미했다, 즉 초석론(그들의 죽음은 전후 평화의 초석이다)에 대한 비판의 입장이 그 세 가지 입장이다(靑木秀男, 「殉国と投企:特攻隊員の必死の構造」). 우선 1)의 입장에 대해서는 특공이 미군의 일본 본토공격을 지연시키고, 나아가 일본의 강렬한 저항의식에 대한 인상을 줌으로써 미국과의 강화를 촉진시켰다는 점에서는 전략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을 무의미하다고는 볼 수 없다는 해석은 가능할 수 있지만, 작전 초기를 제외하면 특공작전은 연합군에 의해 그 실체가 완전히 파악되어 거의 도륙당하는 상태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나아가 특공으로 인해 미군은 본토 상륙을 주저하게 되고, 이 때문에 원폭투하를 준비하게 했다는 해석도 있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하지만 2)의 입장에 대해서는 사정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당시 특공대원의 수기나 편지에는 개죽음일지 모른다는 자기소외만이 아닌, 자신의 죽음에 어떤 방식으로든 의미를 부여하려는 강렬한 열정과 고뇌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3)의 입장은 특공의 죽음에 대한 일종의 역사적 평가, 가치의 문제로서, 개개의 역사관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이렇듯 개죽음이라는 범주 속에는 이상과 같은 세 가지(혹은 그 이상의) 입장이 서로 혼재되어 있으며, 하나의 입장을 받아들인다 해도 다른 입장들은 거부하는 등, 일원화되기 어려운 측면들이 존재한다. 이상의 논의들은 순국과 개죽음이 기존의 관습적인 구분과는 달리 그 의미장이 서로 겹쳐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충군애국을 강조하며 그들에 대해 경탄과 존경심을 표하는 순국론과 군부 이데올로기에 속은 젊은이들의 헛된 죽음을 강조하며 가련함과 연민을 느끼는 개죽음론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둘 다 순수한 젊은이들의 희생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겹친다는 것이다. 또한 충군애국이라는 기표가 단순히 천황이나 국가를 위하여가 아닌 향토,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연인으로까지 그 의미장이 확대될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오오누키 에미코, 이향철 옮김,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차이가 있다면, 한 쪽은 그 희생의 자발성을, 다른 한 쪽은 강제성을 강조하는 것의 차이일 뿐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특공을 이해하는 데 있어 ‘지원이냐, 강제냐’라는 이분법이 커다란 변별점이 없다는 점을 주지한다면, 순국과 개죽음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공방을 지양하고, 순수한 젊은이들의 희생이라는 공통의 의미장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러한 희생을 초래한 책임의 소재를 규명하면서 그 죽음의 의미를 공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영진, <애국과 동아시아>,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303-306쪽.  
한순미 외저,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감성총서 제9권] 우리시대의 사랑, 303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