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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져버린 일민족 일국가의 상상

애(愛)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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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한국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은 어떻게 민족공동체를 대표하는 정치기구로서 정당화되었고, 또 그 구성원들로부터 사랑의 대상이 되었을까? 해방 직후 한반도의 근대 국가 형성 과정은 폭력을 독점한 특정 집단보다는 민족공동체의 근대국가수립에 대한 열망에 기초해 있었다. 그것은 식민통치의 억압 속에서 오랜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 공동체라는 자의식이 오히려 강화된 결과였다. 해방 직후, 김구金九는 해외에서 귀국 후 첫 대국민 방송에서 애국의 길을 다음과 같이 강변한다. 우리는 완전히 독립 자주하는 또는 남북이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야 자사적 입장을 버리고 오직 “국가지상” “민족지상” “독립제일”의 길로 매진합시다. 네당 내당도 국가가 있은 뒤에야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존재할 여지도 있는 것입니다.(<<동아일보>>, 1945.12.30.) 김구의 말처럼, 해방 직후 애국의 의미는 “완전히 독립 자주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네당 내당도 국가가 있은 뒤에야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존재할 여지도 있는 것입니다.”라는 것은 곧 국가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민족이라는 공동체 역시 그것을 대표할 국가가 없이는 그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지상”, “민족지상”이라는 문구가 상징하듯이, 국가는 곧 민족이었고 민족은 곧 국가를 의미했다. 때문에 해방 직후 한반도에서 애국은 국가를 사랑하는 것이자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즉 관념상으로 국가를 민족공동체가 가지는 정치적 기구로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국가 폭력의 주체와 대상이 일치하는 공동체를 상상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역사적 과정은 민족공동체와 국가가 불일치하는 상황을 가져왔다. 이제 하나의 공동체로 상상되어왔던 민족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정치체제로 분열되었다. 이것은 민족공동체를 대표하는 정치적 기구가 두 개임을 의미했다. 동시에 민족공동체를 사랑한다는 것으로서의 애국이 곧 국가를 사랑한다는 것으로 직결되지 못하는 사태를 가져왔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오히려 두 개의 분단국가는 민족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궁극적으로 부정되어야 할 대상으로 이해되었다. 이처럼 국가의 정당성을 공동체의 구성원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사태는 국가를 통해 폭력의 독점을 요구하는 집단과 그것을 강요당하는 집단 간의 괴리를 발생시켰다. 때문에 당시 남북한의 국가는 각각 그 스스로를 민족공동체를 대표하는 유일한 정치기구로 정당화시키면서 또 다른 폭력의 독점 세력과 경쟁해야 하는 처지였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전쟁은 무엇보다 영토 또는 조직으로서의 국가와 ‘국민’으로서의 국가 간의 괴리를 극명하게 하는 사태를 가져왔다. 전쟁의 전선이 교착되면서, 또는 후방 지역 ‘빨치산’과의 전투가 계속되면서 점령 지역이 바뀌었고, 국가조직은 점령 지역을 따라 이동할 수 있었지만, 국민은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때문에 피난갈 수 없었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전선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점령국가에 충성을 바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결국 전쟁 중 ‘국가/국민’의 관계 그 자체는 더욱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상태가 되었다.(김동춘, <<전쟁과 사회>>) 그런데 전쟁이라는 사태가 가져온 환경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는 남과 북의 국가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심리상태였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길에 오르지 못하고 서울에서 북한군의 점령기를 일기로 남긴 한 역사학자의 일기를 살펴보자. 나는 본시 대한민국에 그리 충성된 백성이 아니었다. 그(대한민국)의 해나가는 일이 일마다 올바르지 못한 것 같고 그의 되어가는 품이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아서 언제든 한번은 인민공화국 백성이 되지 않을 수 없는 날이 오려니 하고 예견하였었다. 그러므로 육군이라 써붙인 찝차를 타고 마을길에 들지를 아니하였고 대한청년단에서 교양강좌를 맡아달라는 것을 병이라 핑계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인민공화국에 대해선 각별한 향념을 품었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 사람들이 모여 말끝마다 우리의 영명한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부르고 모든 사회 현상이, 심지어 우순풍조雨順風調한 것조차 김일성 장군의 영명하신 지도의 덕택인 것처럼 떠든 것이 비위에 맞지 않아서 (…) 아내가 간직하여 두었던 태극기를 내걸었다. 석 달 동안 낯선 인공기가 펄럭이던 바로 그 깃대에 다시 태극기를 달아놓고 적이 마음이 후련해짐을 느끼었으나 해바라기인 양 이 깃발 저 깃발을 갈마꽂는 내 몰골이 몹시 서글프기도 하다. 그러고도 행여 산에 있는 게릴라 부대들이 이 깃발을 보고 밤에 내려와서 말썽을 부리지나 않을까 적이 걱정되는 내 마음의 잔조로움이여.(김성칠, <<역사앞에서: 한 사학자의 6·25일기>>) 하나는 인민군 점령기인 1950년 9월 16일에, 다른 하나는 ‘9·28서울수복’ 이후인 10월 6일에 작성된 것이다. 물론 한 개인의 기록이지만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국가와 현실에 대한 심리상태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당시 필자의 심리에는 남과 북 양쪽 국가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깊이 새겨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곧 인민군 치하 지하에 은신하면서도 대한민국은 ‘올바르지 못하고 미덥지가 않아서 언제든 한번은 인민공화국 백성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 예견’이 들고, 그렇다고 인민공화국에 대한 각별한 ‘향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위에 맞지도 않은’ 상태이다. 한편 점령군이 바뀌어 세상이 바뀜에 따라 ‘인공기’ 대신 ‘태극기’를 깃대에 달아놓고도 마음 한구석 서글퍼지면서, 행여 산에 있는 게릴라 부대의 해코지를 걱정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생존을 위해 현실적 대응을 하면서도 그 심리 상태는 정처 없이 부유하고 있다. 즉 이쪽 세상에서는 저쪽을 저쪽 세상에서는 이쪽을 회상하면서, 어느 쪽으로도 스스로를 일치시킬 수 없는 심리적 곤경이 전해진다. 요컨대, 해방 직후 국가는 민족공동체가 가지는 정치적 기구로 이해되면서 애국은 곧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자 국가를 사랑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독점적 폭력 행사의 주체와 대상이 하나로 상상되는 공동체로서, 민족이 곧 국가이고 국가가 곧 민족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분단은 한반도에서 폭력의 독점을 경쟁하는 두 개의 국가를 출현시켰다. 또한 각각의 국가 내에서도 폭력의 독점을 요구하는 집단과 그것을 강요당하는 집단 간의 간극을 심화시켰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은 이러한 모순과 충돌을 극대화시켰다. 이제 대한민국은 스스로를 독점적 폭력 행사의 주체와 대상이 일치하는 새로운 상상의 공동체로 의미화하면서 애국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때의 애국은 해방 직후 애국이 가졌던 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김봉국·오창환, <근대 국가와 사랑>,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282-286쪽.  
한순미 외저,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감성총서 제9권] 우리시대의 사랑, 282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