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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한다는 것

애(愛)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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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적 취향이 발휘되는 양상은 다른 예술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유별난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음악작품이 마음에 들 경우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음악작품을 반복하여 듣거나 연주하게 된다. 고전적인 소설이나 영화를 수십 번 반복해서 보는 문학 애호가나 영화 애호가가 있을 수 있겠지만 흔한 일이 아닐뿐더러 음악 애호가의 경우는 반복청취의 회수가 수십 번이 아니라 수백 번이 될 수도 있으며 향수의 기간 또한 평생을 가기도 한다. 그것은 모종의 중독 증상이나 집착에 가까운 정서적 태도로 보이지만 음악에서는 상당히 흔한 일이다. 인간의 행위 가운데 이러한 음악하기와 가장 유사한 양상을 띠는 것이 사랑하기인 듯하다. 중독의 증상을 수반한다는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음악하기는 신체의 작용과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차분한 미적 관조와 연결되기보다는 말 그대로 “좋아한다”는 것, 곧 신체 반응에 입각한 열광과 애호의 감정 영역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감정적․정서적 반응이 즉발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음악적 애호나 취향의 문제는 쉽사리 자연적이거나 본능적인 것으로 판단되기도 한다. 이 점에서 음악은 ‘좋아하는 행위’ 나아가 ‘사랑하는 행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과연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것은 자연적이거나 본능적인 충동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음악적 취향을 포함한 취향 일반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작용한다는 식의 판단에 대해 가장 거칠게 반박한 이들 가운데 한 명이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다. 그는 대표작 <<구별짓기>>(‘취향(취미) 판단’의 보편성을 옹호한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대한 사회학적 논평의 의미를 담아 ‘판단력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라는 부제를 쓴)에서, 취향이 자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그저 “각 취향이 스스로를 자연스럽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다소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에 따르면, “취향은 운명적 사랑, 운명의 선택이지만, 강요된 선택으로, 필요 취향을 제외한 다른 모든 가능성을 순진한 몽상으로서 배제해 버리는 생활조건의 산물이다.” 예컨대 한국의 1970년대 시골에서 갓 상경한 20대의 공장노동자가 클래식음악에 대한 취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개연성이 높은 그의 음악적 취향, 곧 나훈아나 남진과 같은 트로트 계열의 음악에 대한 그의 취향은 사실상 “운명적 사랑”과 “운명적 선택”의 형식으로 그의 삶과 조우하지만, 그것은 또한 그의 “생활조건”에서 배태된 “강요된 선택”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취향은 부르디외가 말하는 아비투스, 곧 “육화된 계급문화”가 된다. 아비투스는 말하자면 몸에 밴 습속인데, 음악하기(부르디외는 “음악이야말로 가장 육체적인 예술”이라고 말한다)에서 매우 잘 드러난다. 예컨대 격식 있는 레스토랑의 회식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노동자 계급의 아비투스의 문제라고 할 때, 이는 그가 클래식 공연장에 갔을 때 좀 더 극적으로 드러난다. 반대로, 완고한 상류층의 클래식 애호가가 트로트 음악을 들을 때 보이는 정서적 반응은 두드러기나 알러지 반응에 가까운 것이다. 이는 아량이나 관용의 발휘 이전에 나타나는, 말하자면 조건 반사와도 같이 의식 이전에 나타나는 신체적 반응인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이렇게 계급화되어 있고 ‘계급화된 육체’가 취향을 매개로 음악하기에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그래서 “어떤 음악을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은 사회적 관계 설정에 있어서 매우 위험한 질문 가운데 하나다. 이 질문에 어떤 솔직한 답변이 제시되느냐에 따라 민주화의 형식적 절차에 의해 가려지고 은폐된 우리의 계급화된 신체가 그 벌거벗은 몸뚱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최유준, <음악하기와 사랑하기>,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188-190쪽.  
한순미 외저,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감성총서 제9권] 우리시대의 사랑, 188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