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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결핍이 낳은 것

애(愛)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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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은 심리적으로 만족을 기대했던 것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추상적인 것이 채워지지 않은 경우에도 결핍이라 말할 수 있다. 결핍은 곧 무엇인가 채움 혹 충족이 기대되는 상황에서 채워지지 않은 부족함 혹은 결여 상태라 말할 수 있다. 결핍은 사랑과 관련시켜 논의될 수도 있다. 우리들은 조선시대의 세종, 성종, 영조, 정조 등을 성군으로는 꼽는다. 이들은 물론 천품이 뛰어났다. 하지만 아낌없는 주변의 관심과 사랑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 수양을 통해 성군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성종은 소혜왕후의 지극한 사랑 속에 성장했다. 그가 왕위에 오른 일은 모후인 인수대비와 한명회, 신숙주 등 세조의 공신들의 공대를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 알다시피 성종은 효자로 소문이 난 군주로, 모후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음을 방증해 준다. 불행히도 성종의 아들 연산군에게 이런 사랑이 없었다. 연산군은 태어난 지 만 1년 만인 두 살 때에 궁궐 밖으로 옮겨져 3년간 궐 밖에서 살았다. 4세 때 생모가 쫓겨난 데 이어 7세 때는 사약을 받는 참혹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연산군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궁궐로 되돌아 왔는데, 그는 당시 왕비로 있던 정연왕후 윤씨를 생모로 알고 자랐다 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결핍의 지층들은 증오로 채워져 갔다. 즉위 직후부터 연산군은 부친 성종에 대하여 패륜에 가까운 악행을 저질렀다. 그는 성종의 초빈 때 부왕이 기르던 사슴을 쏘아 죽여 구워먹고 부왕의 영정을 걷어 손으로 때렸으며, 나중에는 그것을 표적으로 삼아 활을 쏘기도 했다. 성종이 세운 옛 법률을 폐지하거나 성종을 위해 제사를 올리는 사람들을 처벌했으며, 부왕의 기일에 사냥을 하거나 선릉에서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가장 극단적인 행동은 대취하자 선릉을 파오라고 지시한 사례일 것이다. 연산군의 슬픔과 그리움은 자책감 그리고 적대감으로 확산되었으며,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라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관련자들은 전원 관직이 삭탈되거나 유배를 당했다. 한명회를 비롯하여 정창손과 정인지 등 작고한 원로대신의 무덤까지 파헤쳐서 시신이 훤히 드러나는 참혹한 상황을 맞았다. 이런 극단적인 행동이 모후로부터 받아야 했던 사랑의 결핍과 무관한 것일까! 영조의 경우 숙종의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했으나, 그의 이복 형 경종은 나약하고 부왕 숙종의 정신적인 학대를 받아 병들어 갔다. 숙종은 경종이 조금만 실수해도 “누구 아들인데 그렇지 않겠느냐”며 면박을 주곤 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십대 초반에 부왕의 냉대와 눈치 속에서 경종은 사랑이 결핍된 채 제대로 자랄 수가 없었다. 명색이 왕세자였지 부왕의 냉대와 눈치 속에서 몸과 마음이 망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경종과 달리 영조는 부왕과 생모의 사랑 속에서 자랐다. 경종보다 6살 아래의 영조는 생모 숙빈 최씨와 함께 살며 정신적ㆍ육체적으로도 건강하게 자랐다. 숙종 28년(1702)에 인현왕후 민씨의 뒤를 이어 왕비가 된 인원왕후 김씨도 경종보다는 영조를 사랑했다.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은 11살에 혼인했으나 혼인 후에도 8년 이라는 오랜 세월을 궁궐에 머물렀다. 그 세월 동안 그는 부왕 숙종과 생모 숙빈 최씨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것이다(신명호, <<왕을 위한 변명>>).  
 
김창규, <사랑의 역사적 흔적들>,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60-62쪽.  
한순미 외저,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감성총서 제9권] 우리시대의 사랑, 60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