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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수(愴壽)

애(愛)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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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위에서 살펴 본 재현매체들의 저마다 고유한 특징들을 종합하고 있다. 영화는 현실 세계를 정확히 복제해서 스크린 위에 옮겨 놓는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의 대표적인 재현매체다. 무엇보다도 독립영화라는 장르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과 그들이 견뎌야 하는 삶의 조건을 진실하게 재현해내는 과정 속에서 감성의 역사를 주관적인 의도 없이 기록하고, 동시에 그에 대한 한 가지 혹은 여러 가지 해석을 보여준다. <창수>(2013)는 독립영화는 아니지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각광받았던 영화다. 이 영화는 더 이상 추락할 곳 없는 밑바닥 인생을 살던 주인공 창수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창수의 삶은 성도 없는 그의 이름 그대로 모질게도 슬픈 목숨이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버려졌고, 그것도 모자라 성인이 되어서는 다른 사람의 감옥살이를 대신하는 일로 돈벌이를 한다. 지나치게 화려한 색상의 티셔츠, 우수에 찬 얼굴, 고개를 젖히며 앞머리를 휙휙 날리는 몸짓, 건들거리며 곧지 않은 걸음새가 순탄치 않았던 창수의 인생사를 말해준다. 밤길을 걷던 창수 앞에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선다. 차에서 내린 폭력조직 지성파의 2인자 도석은 내연녀 미연과 말다툼하다 뺨을 때리고 복부에 주먹질을 한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창수는 폼 잡고 말려 보려 했지만 외려 도석의 당수 일격에 나가떨어진다. 그것은 마치 깡패집단과 다를 바 없는 사회의 한 조직에 맞섰다가 단번에 버림받는 무력한 개인을 보는 듯하다. 창수와 미연의 만남은 본의 아니게 그렇게 서로에게 가장 나약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세상물정 모르는 창수는 미연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사랑에 빠지고, 그녀가 잠시 자신의 집에 머무르는 동안 칫솔꽂이에 꽂아둔 칫솔을 바라보며 행복해 한다. 내일이 없던 그에게 미연과의 만남은 내일을 살고 싶은 이유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감옥살이 대행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어떤 새로운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그녀와 함께 내일을 살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녀를 향한 순수한 사랑이 그의 삶의 의미를 바꿔버렸다. 창수는 감옥살이한 대가로 받은 돈을 털어 반지를 산다. 미연에게 청혼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행복한 단꿈에 젖었던 것도 잠깐, 반지를 주기 위해 집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칼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채 침대에 누워 있다. 창수는 그녀와 사랑에 빠진 지 불과 삼일 만에 그녀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경찰과 조폭의 추적을 피해 도망 다니게 된다. 그것은 내일로부터 도망쳐 살아온, 내일을 책임지지 않으려 했던 그의 예전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내일도 오늘처럼 비겁하게 오래 살기가 좌우명이었던 그였다. 그는 도망 다니던 중 미연과 함께 했던 추억을 회상하다 불현듯 그녀도 고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과 삶의 뿌리가 일치하는 그 혹은 그녀와 일체감을 느끼는 걸까? 그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내가 태어날 때도 내 맘대로 못 태어나고, 여태까지 살면서도 난 내 맘대로 해 본 적도 없고, 남의 인생이나 좆나 살아 주고, 이런 씨발 죽을 때는 내 맘대로 한 번 해 봐야겠다. 씨발... 창수가 맘대로 한 번 해보고 싶었던 것은 죽은 미연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는 도석으로부터 지켜주겠다고 그녀와 약속했었다. 그는 안타깝게도 경찰에 붙잡혀 살인죄로 교도소에 수감되지만, 10년 동안 감옥살이하면서 치밀하게 복수를 계획한다. 창수는 출소 후 도석을 찾아간다. 가까스로 복수에 성공하지만, 그의 생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미연이가 있는 납골당으로 간다. 그녀에게 청혼하면서 선물하려 했던 반지를 주기 위해서다. 내가 너 괴롭히는 놈들 싹 정리하고 왔어. 내가 와서 좋지? 나도 니가 옆에 있어서 좋다. 이제 멀리 도망가야지 우리... 미연아... 미연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조차 돌보지 않는 창수에게서 소시민들이 꿈꾸는 영웅의 모습이 엿보이는 것은 왜일까? 소시민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도록 합리성으로 분칠한 사회의 비합리성에 맞서는 패배자의 비합리성 때문일까? 창수는 사회의 승자들에게 꺼드럭거린다. “난 조금 비겁하지만 너희를 이용해서 돈도 벌고 니들보다 잘 났다.” 그는 능력 없는 하류인생이지만 약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그는 친동생처럼 아끼는 상태의 배신 때문에 폭력조직으로부터 폭행을 당해 온몸이 망가지고 징역살이를 하면서도 끝까지 상태를 보듬는다. 태어날 때부터 사회의 패배자로 하류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창수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향한 신뢰와 의리, 즉 신의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사람에게 신의를 지키는 삶을 살아 온 사람만이 죽어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걸까? 그런 삶이 몸에 베인 사람만이 진정 사랑할 수 있는 걸까? 창수는 어쩌면 그것을 우리에게 온몸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려거든 그렇게 하라고! <창수>는 요즘 문제시된 사랑에 대해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암시적으로나마 지적한다. 사랑의 불가능성의 원인이 다름 아닌 사회라는 것이다. 사회의 패배자에게 사랑은 사치다. 아니 사랑 자체가, 연애 자체가 불가능하다.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서 모질게도 슬픈 사랑, 그러한 사회 속에서는 죽어서야 가능한 사랑은 순수한 사랑의 변이가 아닐까? 모질게도 더욱 슬픈 것은 태어날 때부터 사회의 패배자에겐 법적으로도 사랑받을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창수>의 마지막 장면은 그것을 확인시켜준다. 하늘담재 93672호에 안치된 故 이미연 님은 연고자가 없는 관계로 법적 절차에 의해 무연고 분묘 처리 되었습니다. 창수와 미연의 사랑을 최소한 법적으로나마 보장해 줄 수 있는 사회는 어디에 있을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사랑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사랑할 수 있는 사회는 결코 오지도 않을 것이고,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사랑이라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  
 
김기성, <사랑의 변이>,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49-53쪽.  
한순미 외저, <<우리시대의 사랑>>, 감성총서 9.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  
  [감성총서 제9권] 우리시대의 사랑, 49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