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幼子)는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기유년(1789, 정조 13) 12월 25일에 태어났지만, 실은 경술년(1790, 정조 14)으로 입춘(立春)이 지난 뒤였다. 그런데 경술년은 아버님의 회갑(回甲)이었으므로, 아버님께서는 그 애를 사랑하시어 늘 동갑(同甲)이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나는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송구스러워 ‘구장(懼䍧)’ 이라고 불렀다. 그 애에 대한 사랑이 유달리 깊어 구악(懼岳)이라고 바꾸어 불렀는데, 구악도 매우 따랐으므로 잠시도 떼어놓지 못하게 하였다.
신해년 (정조 15, 1791) 3월에 내가 진주(晉州)로 아버님을 뵈러 갈 때, 간신히 다른 말로 속이고서야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이윽고 진주에 도착한 뒤에 구악이 천연두를 앓았는데, 병중에 여러 번 아버지를 부르며 애써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3월에 내가 진주에서 돌아오니, 구악은 아직 얼굴을 알아보기는 하였으나, 전처럼 가까이 따르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서 다리의 종기로 기운이 다하여 죽었는데, 그 때가 4월 2일이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이 어려서 죽은 자신의 아들에 대한 애통한 심정을 광명(묘지문)으로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