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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 ‘새로운 삶의 지평’

애(哀)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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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움이 단지 설움에 그치지 않음을 우리는 앞서 분석한 죽음의 서사의 B)와 C)를 통해 찾아낼 수 있다. 낯선 것을 낯익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미완의 서사를 완결된 서사로 만드는 것은 삶과 죽음의 연접으로 표현되는 죽음에 대한 철저한 인식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때 인간은 설움의 정념을 넘어서 슬픔의 정념에 이르게 된다. 한국 시가에서 슬픔의 정념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난 예로 「제망매가」를 들 수 있다. 죽고 사는 길 예 있으매 저히고 나는 간다 말도 못다 하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다이 한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누나 아으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내 도닦아 기다리리다(양주동 풀이) 이 노래는 첫행부터 삶과 죽음이 이접된 것이 아닌 연접된 것임을 말한다. ‘죽고 사는 길’이라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삶의 행로일 터인데, 그것이 북망산천이나 황천처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다는 인식이 통렬하다. 앞서 분석한 B)와 C)의 서사에서처럼 과거와 미래의 타자와 자신의 죽음이 결국 여기 내 삶의 길과 함께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니다. ‘저히고’에서 보듯, 그것은 두려운 것이고, 또 ‘간다 말도 못다 하고 가는가’에서 보듯, 깊은 회한을 남기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앞서 상여소리나 씻김굿 무가에서처럼 죽음을 ‘오지 말아야 할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죽음과 이접하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이 좌절됨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함을 아는’ 양태성을 통해 담화층위에서의 완료상으로 나타남으로써, 그레마스와 퐁타니유가 말한 종결적 변조를 예측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양태적 주체는 앞서 상여소리 등과는 다른 방향을 선택한다. 그것은 ‘할 수 있다’의 양태동사로 나타나는 지속상을 말하는데, 시적 화자의 죽음에 대한 통찰은 그저 죽음을 삶과 이접시키는 데 머물지 않고, 죽음을 삶으로 껴안게 되는 것이다. 이는 두 단계를 거쳐 나타난다. 첫 번째는 죽음에 대한 은유적 인식이다. 죽음이 가져다주는 이접은 곧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에서의 잎들 간의 이접으로 변형되는데, 이러한 변형은 인간을 자연과 하나로 묶는 범우주적인 사유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시적 화자가 삶과 죽음을 연접시키는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새로운 미래의 전망을 미타찰이라는 사후 세계에서 찾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미래의 시공간은 이미 현재에 기획된 것이기에, 이는 앞서 C)의 서사에서처럼 현재의 삶과 미래의 죽음이 연접됨으로써 죽음에 대한 인식론적 사유가 극대화됨을 보여준다. 이는 죽음을 삶으로 껴안으려는 욕망의 양태성이 구현되는 것이며, 이로 인해 담화 층위는 기동상으로 전환한다. 이러한 기동상에서 예측할 수 있는 것은 개시적 변조로서, 이는 설움일 수도 있는 정념이 슬픔으로 승화되면서, 미래에 대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한용운이 노래한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경지에 이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송효섭, <설움을 넘어 슬픔으로-죽음에 대한 기호학적 스케치>,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32-133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132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