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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체성의 정치가 소환한 저기의 순수한 시원

애(哀)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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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안에서 이주여성들의 고행담, 눈물의 과잉, 슬픔의 공조 등으로 이어지는 맥락들은 최종적으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의 정치를 소환한다. 이 자리에서 가장 손쉽게 합의하는 지점은 지금 여기가 아닌 그때 저곳의 호출이다. 현재 이곳(이주지)의 불안정함은 저곳에 대한 환상을 더욱 강렬하게 유인한다. 이때 나를 추방시켰던 저곳이 새로운 낙원, 순수의 시원으로 탈바꿈된다. 현재의 고난에 의해 재탄생된 저곳의 유토피아는 이렇게 만들어진 ‘허구’의 것이다. 집 밖에서 죽어나간 그녀들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곳은 아이러닉하게도 자신들을 추방시킨 고향의 기표들이다. (고향이 소환되는 이 자리는 남/녀의 구분을 초월하고 있다.) ‘너는 누구냐’라는 거울 앞의 물음 앞에서 낯선 ‘나’ 앞에 등장한 저곳의 환영(幻影)은 지금 내가 있는 현실적 맥락들을 지워버린다. 현실적 맥락들이 제거된 자기유폐의 공간 안에서 나의 슬픔이 오롯이 나로부터 자초한 일이며, 이 슬픔을 벗어나는 길은 내가 왔던 제일 처음의 그곳으로 돌아가는 일이라는 그녀들의 선택과 결정은 그래서 언뜻 말이 될듯 싶다. 그래서 내가 왔던 애초의 그곳은 언제나 신성한 무엇으로 등장한다. <<나마스테>>에서는 티베트의 성소 ‘카일라스’, <<잘가라, 서커스>>에서 ‘정효공주 묘’, <<가리봉 양꼬치>>의 ‘발해풍의 정원’ 등은 향수적이며 귀환적 성격의 기호들로 이곳(이주지)의 험한 세상과 대비되는 순수한 시원의 공간으로 재현된다. 이토록 명백한 이곳과 저곳의 경계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곳에서 다시 저곳으로의 이동은 무엇을 말하는가. 순수한 시원(始原)에 그/녀들의 몸을 안착시킴으로 한편으로 자본주의의 교환체계에서 파생된 전시품으로서의 몸을 삭제하고자 하는 작가(우리)의 욕망을 만난다.(사실, 이 욕망이 더 위험하다.) 이러한 논리는 일반적으로 죽어 정화되는 몸의 논리인 셈인데, 그래서 죽어야 한다는 논리인데, 이 논리에 개입하고 있는 주체 동일성의 폭력은 일찌감치 많이 보지 않았는가. 죽어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솎아내는 일, 순혈의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 추방당해야 하는 희생제물의 위치를 다시 확인한다. 순수한 시원에서 너무 멀리 온 ‘그녀들’은 예정된 제단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는 불온한 타자들을 제거함으로 근대적 공간성을 획득하려는 근대기획의 욕망으로 봉합되는 지점이다. 연민과 동정의 시선으로 그녀들의 슬픔에 동조하고자 했던 작가의 선한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선한 의지의 발신지가 근대적 기획에서 출발하고 있음이 들통 난 셈이다. 이 자리에서 다문화의 환대는 더 이상 없다.  
 
문재원, <이주의 유령>,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11-112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111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