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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공모로 탄생되는 감성과 허구적 센티멘탈리즘

애(哀)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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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그녀들은 왜 집을 나갔을까? 집 안팎에서 울고 있는 그녀들의 눈물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눈물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녀들에게 손수건을 내밀고 눈물을 닦아줄까?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을 거라는 가사와는 반대로 여자가 부르는 노래는 슬프다.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을 거라면서 여자는 계속 계속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다.(공선옥 「가리봉 연가」) 마이너리티들의 사진 찍는 일을 하며 전국을 다니는 작중인물 ‘한’은 가리봉 노래방에서 명화, 가수 허승희를 만난다. 가리봉 연가 한곡을 부르겠다며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을 거야> 라는 노래를 부르는 명화를 보며 그는 슬픔의 정조를 느낀다. 슬프지만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여전히 알 수 없는 슬픔이 한을 휩싸고 있다. 슬픔의 전이(轉移). 그러나 그 전이는 노래 부르는 사람/ 듣는 사람, 더 정확하게 말해 노래 부르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에서 상상된 슬픔이다. 이러한 ‘한’의 위치는 작가의 시선과도 연결되고, 독자의 시선과도 연결된다. 일반적으로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우리도 모르는 알지 못하는 슬픔은 아직 내가 그 슬픔과 대면할 항체를 준비하지 못한 데서 온다.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알기가 두려운 것이며, 아직 내가 그 슬픔과 마주할 수 없음은 동일성의 ‘주체보존’의 욕망이 여전히 나를 강하게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우리의 감성이 실은 지극히 정치적 공모를 통해 탄생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수잔 손탁은 고통의 이미지를 읽을 때 추상적인 동정심이나 대상과의 일체감으로 손쉽게 환원하지 말 것을 제안한다. 벌거벗은 생명의 고통의 이미지들을 보고 동정심을 느끼는 한 우리는 적어도 고통을 야기한 동조자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동정심은 우리가 그 고통의 제공자가 아님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 고통에 대해 이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을 드러낼 뿐이라고 했다. 나아가 손탁은 벌거벗은 생명의 이미지에 대해 그 고통과 상상적 유사성을 느끼면서 타자와 연결되려는 것은 현실의 권력관계를 단지 신비화시킬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고통의 이미지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그 이미지에서 배제된 이미지와 배제된 고통, 그 고통을 야기한 잔인함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한결같은 이국적이고 낯선 얼굴과 이어지는 고행담의 정형성이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선을 설정하고 문턱의 경계에서 지켜보는 감시의 시선, 혹은 공범과 연민의 서술자의 위치는 재고되어야 한다. 이주여성들의 최루성 신파들은 이주여성=피해자로 각인시켜 연민이나 온정의 효과는 달성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때 문제는 최루성의 환각 안에서 이 여성들의 언어가 녹아내리고 있다. 어디서, 왜 그녀들이 이 고난의 행진에 올랐는지, 그녀들을 보낸 것은 무엇인지 우리는 듣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여성들의 이주에 뿌려져 있는 눈물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는(눈 돌리게 하는) 마취제일 수 있다. 하여, 눈물의 서사가 넘쳐날수록 우리는 그녀들을 떠나게 했던 보이지 않는 손의 덫에 걸린 환상(허구)의 센티멘탈리즘 안에 취해 있다.  
 
문재원, <이주의 유령>,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09-111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109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