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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신파극, 여성 이주의 서사

애(哀)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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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다문화의 향연은 눈물마르지 않는 현장이다. 다문화가정을 만들어내기 위한 필수조건이 눈물인지, 눈물이 통과의례인지 모르겠지만, 이 여성들은 오기 전에도 울고, 와서도 울고, 나가면서도 운다. 천운영의 <<잘가라, 서커스>>는 조선족 여성 림해화가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와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 손에 쥐여진 것은 F-2 비자였다. 한국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고, 부모까지 초청할 수 있는 동거방한사증.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비자가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쥔 것처럼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이것을 위해 화순은 직업도 버리고 순정도 버렸다. 그는 이것이 없어 무덤 같은 지하방에 숨어 지냈다. 또 누군가는 몇만 위안을 들여 위장결혼을 하거나 밀입국을 한다고도 했다. 그것이 지금 내 손에 있는 것이다. 단 한번의 만남으로, 십수 가지의 서류가 필요하긴 했지만 그 모든 것은 나그네(남편: 필자)의 돈으로 소개소에서 알아서 해 주었다. 도대체 이게 무어길래. 한낱 종이쪽지에 불과할 뿐인데, 알 수 없는 서러움이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천운영, <<잘가라, 서커스>>) F-2 비자, 이것은 한국으로 오는 결혼이주 여성의 증명지이다. 이제 해화는 이 증명지와 교환체계에 갇힌 몸이 되었다. 자유의 이름으로 온 ‘종이쪽지’ 앞에서 알 수 없는 서러움이 치밀어 오르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바로 한 장의 종이쪽지에 구속된, 교환의 전시품이 되어버린 자신을 받아들이는 고통을 전달한다. 이 고통은 이미 해화 개인의 경험을 넘어, 친구 화순이, 그리고 알지 못하는 ‘누군가들’ 조선족 여성들의 집단적 경험으로 전달된다. “행복해 질 것이다.” 는 주문을 외며 해화는 한국(부천)에 왔다. 그런데 해화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처녀시절 사랑했던 첫사랑 남자의 부재를 확인하며 눈물이 솟구치고, 따뜻한 말동무가 되었던 시어머니의 죽음에 유일한 혈육을 잃어버린 상실감으로 눈물만 앞섰다. 그나마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시동생마저 집을 떠나가자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울컥 눈물이 솟았다. 무엇보다 해화에게 가장 큰 상실감으로 다가온 것은 남편의 성적 학대와 폭력이었다. 남편의 집착과 의처증은 그녀의 몸을 쇠사슬로 묶어놓고 성관계를 할 정도로 나날이 폭력적으로 변했다. 결국 해화는 법적 신원증명이 되는 비자와 주민등록증을 반납하고 집을 뛰쳐나온다. F-2 비자가 상징하는 신원증명은 어디에서 왔느냐는 문턱을 넘어갈 수 있는 마차가 되었지만, 정작 해화는 집 안에서 또다시 지배 언어의 상징체계와 교차하는 젠더 권력과 마주침으로 이중의 타자화를 경험해야 했다. 거울 앞에 섰다. 뜬김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으로 거울을 닦아냈다. 낯선 얼굴이 보였다. 퀭하니 들어간 눈 언저리와 아무 감정도 없는 눈동자, 부쩍 숱이 적어진 듯한 머리칼. 이것은 내 얼굴이 아니다. 내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넌 누구지? 나는 거울 속에 대고 물었다. 거울 속 낯선 여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물끄러미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 문득 가슴패기에 난 푸른 멍에 시선을 붙잡혔다. 그리고 발목과 손목에 남은 붉은 전선 자국도 보였다.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따뜻했다. 내 몸은 피가 흐르고 숨을 쉬는 육체였다. 묶이고 갇혀야 할 고깃덩이가 아니었다. … 나는 다시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거울 속 얼굴을 바라보며 이름을 불렀다. ‘해화야’ 내 이름은 해화야, 림, 해, 화. 나는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천운영, <<잘가라, 서커스>>) 위의 장면은 집을 나오기 직전 해화의 심리적인 국면을 드러낸다. 거울 앞의 낯선 얼굴 앞에서 그녀는 근원적인 자기 상실과 마주친다. 이어 “너는 누구냐” 라는 질문에 “나는 림, 해, 화” 라는 응답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해 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나그네의 “충실한 아내가 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해지리라”는 희망과 등을 돌리고 ‘림해화’를 찾기로 한다. 그러나 이미 림해화의 운명이 F-2비자에 결박되어 있음을 확인했듯이, 무작정 집을 뛰쳐 나온 그녀의 미래는 충분히 예상된다. 이후 모텔 청소부와 길거리 약장사를 전전하다 결국 자살을 암시하는 결말을 맺고 있다. 이러한 서사는 공선옥의 「가리봉 연가」의 조선족 장명화 이야기와 흡사하다. 명화는 오빠의 약값을 구하기 위해 어린 아들을 고향에 두고 한국으로 시집왔다. 도착해 보니 약값은 커녕 겨우 밥만 먹고 근근이 살아가는 농촌일 뿐이다.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가출을 감행하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사기를 당하여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가리봉 명가수 허승희’로 노래방을 전전한다. 장명화는 가난 때문에,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국경을 넘었지만, 오히려 더 극심한 가난의 굴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 셈이다. 병든 몸으로 쉬어가는 여인숙에 겨우 몸을 누인 명화는 저쪽 고향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문재원, <이주의 유령>,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100-103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100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