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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허구

애(哀)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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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하여 이미 영화화된 바 있는 일본의 소설 <<배틀 로열>>을 분석하면서 폭력과 개인의 문제를 진단하고 있는 사카이 다카시의 <<폭력의 철학>>의 한 대목을 살펴보고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소설 <<배틀 로열>>은 가상의 공간인 동양 전체주의 국가 대동아공화국에서 펼쳐지는 전투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에 얽힌 이야기가 골자이다. 이 프로그램은 전국의 중학교 3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임의로 50개 학급을 선정해서 펼쳐지는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이다. 하나의 학급을 기준으로 실시되는 이 게임의 규칙은 학생들이 주어진 무기로 서로를 죽이다가 마지막에 살아남은 단 한 사람만이 귀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매번 이 게임의 결과는 크게 보도되고, 살아남은 학생은 영웅으로 포장된다. 게임의 목표는 단 하나, 불신이다. 그래서 국가가 노리는 것은 선택된 중학생들뿐만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 상호불신을 심어 넣는 것이다. 이 게임을 통해 평소 신뢰하는 친구 사이라도 인간이란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서로를 죽일 수밖에 없으니, 이웃을 철저히 불신해야만 한다는 식의 불안한 이념이 유포된다. 나 이외의 모든 타자는 잠재적인 살해자이다. 때문에 개인은 자신을 보호해 줄 더 강력한 권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개인들은 자발적으로 권력에 자신들의 모든 힘을 양도한다. 결국 대동아공화국의 국민들은 안전을 얻는 대신 기꺼이 종속을 받아들이고, 그럼으로써 국가라는 지배적 질서는 안정적인 체계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게임의 기본 원리는 고립화이다. 사람들을 뿔뿔이 흩어진 개인으로 해체하는 것이다. 그 결과 개인주의는 전체주의와 정반대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전제가 되는 역설이 성립한다. 곧 고립되고 무력해지기 때문에 국가나 독재자에게 집약되는 전체성으로 수렴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다카시는 홉스의 사회계약론(리바이어던)의 전제인 자연상태(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란 인공적으로 구축된 것에 불과하다고 보고, 다음처럼 결론을 내린다. (…) 고립된 개인이 서로 싸운다는, 홉스가 연상하는 자연상태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뿔뿔이 흩어진 개인으로는 생존을 위한 힘을 절대로 보유할 수 없으며 늘 서로 도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최소한의 집단성은 항상, 이미 발생하고 있다.(사카이 다카시, 김은주 옮김, <<폭력의 철학>>) 원자론적인 또는 고립된 개체라는 하나의 사태는 권력의 편에서 만들어지고 조장된 이데올로기이거나 허구이다. 결국 고립된 개체들의 생태를 사유의 중심에 놓고, 발생한 갖가지 모순들을 진단하기보다는,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최소한의 집단성 혹은 공동성을 성찰하는 것이 요청된다. 따라서 우리가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해 오고 있는 자유의지 또는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프로파간다를 폐기처분해야 한다. 자유로운 혹은 자율적인 개인들이 계약과 양도에 의해 국가나 사회와 같은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식의 홉스, 로크 그리고 루소를 잇는 사회계약설의 계보들에 대해 의심해야 한다. 장-뤽 낭시에 따르면 개인이란 공동체가 와해되고 남은 찌꺼기에 불과하다. 사유의 방점은 그래서 항상 개체가 아니라, 설사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최소한의 공동성에 있어야 한다.  
 
정명중, <저항은 과연 가능한가>, <<우리 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81-283쪽.  
정명중 외저, <<우리 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281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