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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셋(reset)’ 해버리고 싶다는 욕망의 기원

애(哀)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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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서 한국에서 발생한 증오범죄의 사례들을 낱낱이 열거하고 싶지는 않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그 예들을 부지기수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회적 증오의 게이지가 이미 차버린 상태에서 그 폭발적인 에너지가 과연 어떤 형태로 진화할 것인지 예측 불허라는 점은 매우 심각해 보인다. 아래의 신문 기사가 전하는 우려스러운 사태는 보수우경화로 고착되고 있는 일본의 상황에서 필연적인 귀결이겠지만, 결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바라볼 수만은 없는 듯하다. 아카기 도모히로(赤木智弘․37)는 일본의 ‘잃어버린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2007년 1월 일본의 잡지 논좌(論座)애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를 후려치고 싶다. 31살 아르바이트생. 전쟁을 희망한다’는 섬뜩한 내용의 글을 게재해 일본 사회에 파문을 몰고 왔다. 아카기가 전후 대표적인 정치학자 마루야마를 때리고 싶은 이유는 그가 전후 민주주의․평화 체제를 옹호하고 있고, 전쟁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아카기는 취직빙하기로 불리는 1990년대 중반 사회에 나와 희망 없이 아르바이트로 하루하루를 연명해 왔다. 그에게 일본은 평화롭고, 변화가 없어 자신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회다. 반면 전쟁이 벌어지면 사회가 유동하면서 정규직은 기득권을 잃고 우려가 크지만, 불안정 고용에 시달리는 자신과 같은 이들에게는 기회가 찾아올 수 있다. 아카기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확실하게 나누어져 유동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전쟁이 더는 금기가 아니다.”라면서 “반전평화라는 슬로건은 우리를 일생 동안 빈곤 속에 가둬두려는 가진 자들의 오만”이라고 말한다. 그는 특히 일본 좌파의 호헌파가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노동자로 자신들의 ‘평화적인’ 일상을 지키려 할 뿐 새로운 빈곤층인 불안정 노동자들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최근 일본 청년들 사이에서는 ‘일본 리셋론’이라는 담론도 떠돌고 있다. 일본 정부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200%가 넘는 국가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비세 인상을 추진하고 있지만 재정파탄이 이뤄지게 내버려두라는 논리다. 재정파탄 상태가 되면 기득권층이 가진 금융자산의 가치가 폭락할 수 있고, 그래서 ‘고정화된’ 사회가 유동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사회운동가인 아마미야 가린(雨宮處凛)도 고교 시절 학생들 사이에서 ‘이지메(집단 따돌림)’가 횡행하는 데도 교사들이 이를 방치하면서 한편으로는 반전․평화를 주장하는 태도에 깊은 불신을 갖고 한때 우익활동에 빠져들기도 했다. 일본의 청년층 사이에서 우경화를 탈출구로 삼으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경향신문>>, 2012. 9. 23.) 아가키는 프리타(フリ-タ-)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는 청년이다. 일본의 신조어인 프리타란 ‘프리free’와 ‘아르바이터Arbeiter’의 합성어로서, 일정한 직장이 없이 아르바이트만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을 뜻한다. 불완전 고용에 시달리면서 전망이 불투명한 미래를 불안해하는 아가키에게 일본은 어떠한 변화의 조짐도 게다가 아무런 희망도 없는 고착된 사회이다. 그런 그에게 반전이니 평화니 하는 따위의 슬로건은 좌파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기만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가 바라마지 않는 것은 전쟁과 같은 폭력적인 절차를 거쳐서라도 사회가 완전히 ‘리셋’ 상태가 되어 유동적인 것으로 되는 일이다. 그래야만 자신에게도 기회라는 것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면 가진 것 없는 자신과 같은 프리타 청년들이 대거 참전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평생을 빈곤에 시달리며, 불안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것보다는 전쟁 쪽이 훨씬 다이내믹해 보이기 때문이다. SBS스페셜 <일본청년 아오키의 끝나지 않은 전쟁>의 한 장면 이 리셋에 대한 욕망은 자기의 파괴와 학대라는 마조히즘 성향과 불특정인에 대한 공격과 폭력이라는 사디즘 성향이 서로 맞물려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이 두 성향의 거멀못 노릇을 하는 것은 사회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이다. 이와 같은 파괴적인 욕망을 단지 정치적 차원의 보수우경화에 대한 경고로 읽는 것은 그다지 이롭지 않다. 필시 이 욕망은 증오가 일상적으로 제도화 돼버렸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아울러 그것은 오늘날의 사회체Socius가 오직 죽음 충동만이 넘쳐 나는, 따라서 어떠한 창조적인 흐름도 생산되지 않는 ‘암적인 신체’(들뢰즈와 가타리의 용어)로 돌변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암적인 신체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파시즘이다.  
 
정명중, <저항은 과연 가능한가>, <<우리 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76-279쪽.  
정명중 외저, <<우리 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276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