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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정의 소멸

애(哀)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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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결별하는 일은 자기의 의지와 무관한 곳에서도 일어난다. 역사적 사명으로 하면 된다는 열정으로 달려온 끝에, 예감할 수 없는 죽음과 공포를 도처에서 만나게 될 때다. “노력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으리라 믿었으므로 당연히,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다.”(「삼풍백화점」), 즉 하면 된다는 열정은 아무것도 되지 못하리라는 예감 속에서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는 소멸의 의지를 무감각하게 부른다. 열정은 서둘러 소멸시켜야 할 과거의 유물일 뿐이다. 이 시대는, 열정과 소멸을 이음동의어로 사용한다. 21세기에 속해 있는 지금, 20세기에 쓰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어 본다. 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취업을 했다가 실업자가 된 후, 병태가 “갑자기 낯선, 이상한 곳으로 전학 온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는 대목이다. 그 순간 병태는 초등학교 시절의 엄석대를 떠올린다. 그런 후 병태는 석대가 경찰에게 연행되는 장면을 보게 되고, 그는 늦도록 술잔을 비우면서 눈물을 두어 방울 떨군다. 그리고, “그러나 그게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 그를 위한 것이었는지, 또 세계와 인생에 대한 안도에서였는지 새로운 비관에서였는지는 지금에조차 뚜렷하지 않다.”라고 소설의 끝에 적혀 있다. 병태가 흘리는 그 눈물의 의미가 지금 여기에서 어느 것이라 해도 별 상관이 없을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하고 간신히 취업을 하고 혹 실업자가 된다 해도 그것이 더 이상 무서운 엄석대의 질서와 연관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놀라며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우리는 21세기에도 그렇게 많은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놀랐다. 우리도 자격증이 있잖아. 누군가 말했다. 우리가 배웠던 건 다 없어질 거야. (…) 지금 자격증만으로는 미래에 대비할 수가 없어. (…) 21세기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누군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애써 딴 자격증이 머지않아 무용지물이 될 거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아직은 20세기였다. (편혜영, 「20세기 이력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엄석대의 주먹보다 더 무서운 경쟁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경쟁자는 같은 반 친구들이 아니다. 진짜 경쟁자는 자격증이거나 항상 우리를 앞질러 가는 시대다. 학교가 가르쳐준 지식들을 저장하고 수많은 자격증을 따서 정작 학교 바깥으로 나왔을 때, 그것들은 이미 아무런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학교에서 열정적으로 배운 지식들을 써먹기도 전에 빠르게 삭제되거나 변경되어야 한다.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우리 시대는 학교에서 열정적으로 배운 그 만큼 혹은 그 이상의 소멸을 요구한다. ‘눈물 대신 슬픔 대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학교가 모든 것을 가르쳐줄 것이라는 헛된 믿음을 버리는 일이다.  
 
한순미, <지울 수 없는, 학교>,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92-94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92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