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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매 능력을 상실한 자들

애(哀)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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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진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로 다시 돌아가 보자. 앞서 언급했듯이, 이 작품의 실질적인 갈등은 시민대책위 세력과 밥풀때기라 불리는 자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이를테면 민족민주 혹은 애국 시민과 그 카운터파트로서 밥풀때기라는, 서로 섞일 수 없는(혹은 섞이기를 거부하는) 이질적인 존재들의 대립이 소설을 가로지르고 있는 셈이다. 밥풀때기는 물론 시민이 아니다. 그들은 민족민주 세력으로 표상되는 시민들의 정치적 장에 초대 받지 못한 자, 이방인 또는 타자에 불과하다. 하여간 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시민이라는 용어 앞에 애국이니 민주니 하는 따위의 수식어를 붙이는 게 과히 낯선 것은 아니었다. 한데 21세기인 오늘날 시민이라는 명사 앞에 과연 그와 같은 것을 덧붙이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일까. 애석하지만 오늘날 시민이라는 용어에서 뚜렷한 정치성을 연상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시민의 탈정치화가 상당 부분 진전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거스르기 곤란한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려니와, 궁극적으로 IMF 체제 이후 한국 사회의 지형도가 근본적으로 변해버린 탓이 결정적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근대사회를 특징짓는 공적 영역의 분화와 그것들 간의 상대적 독립성이라는 자유주의 테제가 종말을 고했다. 이로 인해 경제 영역은 물론이려니와, 정치나 문화 영역 가릴 것 없이 시장의 원리 아래 통합되고 재편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삶의 모든 영역이 시장의 법칙과 논리에 따라 조직화되고 식민화됨으로써, 개인들은 물론 개인들 사이의 다양한 관계조차 ‘상품-고객’이라는 단일한 관계의 패턴으로 흡수되고 만다. 곧 일상생활의 상품화가 가속화되는 것이다. 이제 시민이란 단지 소비의 주체로서, 혹은 상품 구매 능력을 보유한 주체로서 호명될 뿐이다. 따라서 소비가 유일한 “민주주의의 대체물”이다. 그런 탓에 “무엇을 먹을까, 무슨 옷을 입을까, 무슨 차를 탈까 하는 선택”이 “의미 있는 정치적 선택”을 대신하게 된다.(존 버거, 최민 옮김, <<다른 방식으로 보기>>) 더 이상 시민은 정치적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능동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소비주의의 패러다임이 상품 구매 능력의 유무에 따라 개인들을 시민(=소비자)과 시민 아닌 것으로 분할한다는 점이다. 만약 정기적인 수입이 없거나 물질적 부가 지속적으로 받쳐 주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언제고 시민 아닌 것 쪽으로 분류될 처지에 놓인다. 그런 우리들에게 이른바 라이프스타일 같은 게 딱히 있을 리 없다.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2012)의 한 장면 게다가 소수에 의한 부의 독점과 자본의 불균형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에서(물론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렇겠지만!) 필연적으로 다수의 개인들이 시민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주장하기는 점점 더 여의치 않게 될 것이다. 오직 구매 능력만이 자신이 존엄한 인격임을 아울러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증명해 준다. 물론 이 능력을 보유하지 못한 자들은 사회적 인정과 관계의 사각 지대로 추방당할 수밖에 없다.  
 
정명중, <저항은 과연 가능한가>, <<우리 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69-271쪽.  
정명중 외저, <<우리 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269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