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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파괴되고 실패하고 병들고 죽어가면서…”

애(哀)
긍정적 감성
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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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밥풀때기에 포함되는 이들은 김소진이 포착했던 90년대 초반 무렵의 양상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그 수효가 늘어났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성격은 다층화 혹은 다변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밥풀때기가 사회의 전 영역으로 마치 바이러스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룸펜과도 다르다. 혹자는 그들을 루저loser라고도 하며, 또는 잉여인간이라고도 한다. 그 명칭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만 관건은 그들을 사로잡고 있을 불안과 공포, 우울과 초조, 원한과 증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에너지가 과연 어디로 향할 것인지, 하는 점이다. 한편 최인석은 <숨은 길>에서 역시나 밥풀때기 부류인 주인공 ‘나’의 입을 빌어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나는 이제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혁명은 오늘날의 나 같은 자들, 범죄자들, 일탈자들, 건단들, 깡패들,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혁명에 유해한 존재라고 규정한 룸펜 프롤레타리아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확신한다. 모든 부패한 공무원들, 모든 일탈자들, 모든 마약중독자와 알코올중독자들이야말로 나의 동지들이다. 그들이 열심히 부패하고 열심히 타락하고 열심히 범법행위를 저지르고 열심히 미치고 열심히 중독되고 열심히 부랑하는 것이야말로 체제를 파괴하는 유일한 길이다. 따라서 그들이야말로 영원한 파괴자들, 가장 위대한 혁명가들이다. 아무런 이념이 없이, 아무런 음모도 없이, 또는 혁명에 대한 아무런 환상도 이상도 미망마저도 없이, 저들은 체제를 그 뿌리부터 뒤흔들어 파괴하는 것이다. 스스로 파괴되고 실패하고 병들고 죽어가면서 체제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최인석, <숨은 길>) 이러한 주장이 작가의 진의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파악할 길이 없다. 다만 위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곧 앞으로 혁명 같은 게 있다면, 마르크스가 유해한 존재로 규정했던 룸펜 또는 밥풀때기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혁명의 전략이란 것도 간명하다. 갖은 광기와 스스로의 파괴를 통해서 체제를 뿌리 채 흔들어 붕괴시킨다는 것이다. 거기에 딱히 명시적인 이념 같은 게 작동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혁명에 대한 환상이나 이상조차 무용하다. 어떤 이는 위의 주장을 두고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불온한 주체들의 탈주 같은 것을 생각할 법도 하겠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주장은 90년대 벽두를 장식했던 소비에트 체제 해체와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맞닥뜨린 거대서사에 대한 피로증후군의 반영이며, 더군다나 80년대 운동권을 주도했지만 시류의 변화를 좇아 이념을 버리고 투항(혹은 전향)의 길을 택한 이른바 386세대에 대한 혐오와 염증의 발로라는 사실을 확인해 둘 필요가 있겠다. 환언하면 위와 같은 주장은 확고한 이념 무장과 혁명에 대한 올곧은 이상을 통해 사회를 총체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열망(=계몽주의)이 물구나무 선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 대부분의 작가들이 변혁 이데올로기의 황혼 앞에서 기만적인 회고담이나 후일담 유의 내러티브를 끼적거리고 있을 무렵, 어떻게든 식어버린 혁명의 열기를 되살려보겠다는 식의 정념은 이채로운 구석이 있다. 게다가 IMF 사태라는 미증유의 사건을 1년 정도 앞둔 시점에서 위의 소설이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딱히 작가의 현실 인식이 갖는 정합성을 문제 삼기도 곤란하다. 다만 이성주의나 계몽주의의 형태로건, 아니면 그것에 대한 반대급부의 심리로서 자기 파괴와 광기와 같은 비합리성의 형태로건 체제의 붕괴나 혁명을 발설하기에 앞서서 지금 당장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싶다. 진보적 인텔리겐치아를 대신해서, 또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신해서 광범위한 룸펜 그룹을 사회 변혁의 주체로서 혹은 위대한 혁명가로 호명할 수 있을 만큼 오늘날의 현실이 결코 녹록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명중, <저항은 과연 가능한가>, <<우리 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267-269쪽.  
정명중 외저, <<우리 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267페이지    E-BOOK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