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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한 사건 앞에서 무력한 암산

애(哀)
긍정적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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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과 함께 강조되었던 것은 “하면 된다.”는 정신이다. 이런 정신을 가장 잘 대변하는 학교 공부는 ‘암산’이다. 암산은 숫자와 숫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에 관한 물음을 막고 그냥 외우는 것이다. 선생님은 당부한다. “암산을 잘하려면 말이지, 연습이 제일 중요해. (…) 꾸준히 연습하는 거야말로 재능이란다.” 그러나 꾸준한 연습으로 나날이 좋아지는 암산 능력은 느닷없이 닥친 ‘우연’한 사건 앞에서는 무력하다. 뺑소니를 목격한 날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을 빠르게 지나가는 차의 번호판을 보고는 네 개 숫자를 얼른 더했다. 숫자의 합을 구하고 나서야 누군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당황한 한은 차 번호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네 개 숫자를 더한 합계만 떠올랐다. 합은 22였다.(편혜영, 「20세기 이력서」) 아무 곳에도 끼울 데가 없는 나사란 슬펐다. 남자는 그 나사가 마치 자기 자신 같았다. 나도 예전에는 어린이 암산왕이었지. 남자의 가슴에서 황금빛 메달이 반짝였다. 홍보팀 전화번호를 합하면 31, 초등학교 때 번호를 모두 합하면 248. 주민등록번호를 합하면 41. 남자의 머릿 속에서 숫자들이 마구 뒤엉키기 시작했다.(윤성희, 「어린이 암산왕」) 암산은 느닷없이 닥치는 우연한 사건을 예측하지 못한다. 암산의 재능은 암산의 속도보다 더 빨리 변화하는 세상에서 더 이상 필요 없는 두뇌계발의 방법일 뿐이다. 초등학교 시절엔 방송에 출연할 만큼 뛰어난 어린이 암산왕이었던 남자는 C시의 임시직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암산왕이었던 남자는 어디에도 끼울 수 없는 나사 같이 버려진다. 한때, 역사적 사명과 하면 된다는 말은 거의 모든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교육이념이었다. 아이들은 그 말을 열정적으로 믿었고 그 열정으로 무궁무진한 가능성으로 가득 찬 미래를 설계했다. 그런데 학교 밖으로 나온 그들은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안 되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우연’한 사건이 예감 없이 찾아오고 ‘속도’가 가치가 된 경쟁사회에서 하면 된다는 말은 학교가 가르쳐준 픽션일 뿐이다. 배운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간극이 점점 커져 마침내 둘 사이에 완전한 균열이 생길 때 학교는 더 이상 추억할 장소가 되지 못한다.  
 
한순미, <지울 수 없는, 학교>, <<우리시대의 슬픔>>,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90-91쪽.  
정명중 외저, <<우리시대의 슬픔>>, 감성총서 7,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3.  
  [감성총서 제7권]우리시대의 슬픔, 90페이지    E-BOOK 바로가기